교구 | 제19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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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명 | 화엄사 |
대표번호 | 061-782-7600 |
팩스번호 | 061-782-7601 |
홈페이지 | http://www.hwaeomsa.com/ |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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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고, 1936년에 찬술된 <대화엄사사적>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 (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입주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 왕 때에 자장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이 장륙전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되어 장륙전의 사방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상 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으로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왔다. 이와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화엄경사경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짐으로써 창건연대가 신라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신라말 도선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사 도에서 이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조형왕사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은 1630년(인조 8) 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그 이듬해 선종대가람을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선교양종대가람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무르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ㆍ낭원ㆍ현준ㆍ결언ㆍ관혜등의 화엄 학승들이 머물렀으며, 특히 신라말 화엄학이 남북악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과 대립된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은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에 예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ㆍ처능ㆍ수초ㆍ명안ㆍ새봉ㆍ조관ㆍ윤장 등이 그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ㆍ윤눌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화엄사의 현존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 및 문수ㆍ보현의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가 종루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서 쌍 탑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밖에도 영산전ㆍ나한전ㆍ원통전ㆍ명부전과 노전으로 사용되는 삼전 및 요사인 적조당이 있다. 이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 기에 조성된 삼신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났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과 사사자석탑ㆍ노주ㆍ동서오층석탑ㆍ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오고 있다. 각황전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작으로 보이는 높이 6.36m 나 되는 거대한 석등(국보 제12호)은 8각의 하대석이 병 모양의 간석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에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써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써 탑을 받고 서 있는 승상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 네마리의 사자가 이마로써 방형의 석단을 받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전사자탑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동탑은 서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 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이룩된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만수천점에 달하는 이들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 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진감국사비를 닮았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교지 1매, 예조사격 1매, 예조홍각대사첩 1매, 겸팔도총섭첩, 예조대선사각성첩 1매, 인조 하사어석 1건, 인조 하사 가사 1령, 인조 하사 어작 1대, 선조 어필각본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바리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 1건,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 1축, 고종,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 1책 등이 있다. 이 절의 부속암자는 신라 경덕왕 때에는 81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암자들이 있었다. 즉, 원소암ㆍ청련암ㆍ적기암ㆍ은무암ㆍ은선암ㆍ백련사ㆍ도선굴ㆍ연기암ㆍ보적암ㆍ내원암ㆍ봉천암ㆍ문수암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을 비롯한 금정암과 지 장암 등의 세 암자만이 있을 뿐이다.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ㆍ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 선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562년 설응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1595년 원응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