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 제24교구 |
---|---|
사찰명 | 선운사 |
대표번호 | 063-561-1422 |
팩스번호 | 063-561-1127 |
홈페이지 | http://www.seonunsa.org |
주소 |
|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707년(숙종 33)에 쓰여진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 라고 하였다. 이 창건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부회되어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 위에서 물러난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에 있는 검단리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즉,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하였다는 것이다. 두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이 중수하였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년 동안 극유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으르러 뜰에 구층석탑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2월 제자 종념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이 쓴 원문을 얻어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해 여름에 나주 보을정도의 재목 1,000여 그루를 3척의 배에 싣고 왔으며, 1473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웠다. 그리하여 1474년에는 2층의 장륙전과 관음전을 짓고,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를 위한 수륙재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이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ㆍ 동상실ㆍ금당ㆍ능인전 등을 짓고, 또한 영산회 등 53불회탱을 조성하였다. 이와같이 10여년에 걸친 극유의 중창불사로 하여 선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189채나 되는 웅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09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승려 수십명이 선방 한두개소를 먼저 지은 뒤 몇 년 동안에 법당 3칸을 지었다. 1613년(광해군 5) 봄에 태수 송석조가 일관에게 중창을 부탁하자 일관은 원준과 더불어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으고, 어실을 빙자하여 고창 문수리에서 재목을 얻어 먼저 보전 5칸을 세운 다음, 상ㆍ하 누각과 동ㆍ서 양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6년 만인 1619년에 끝을 맺었다. 그뒤 1707년(숙종 33)에 이르기까지 일관ㆍ원준 등의 선사들이 서로 계승하여 거듭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 다. 1698년에 김우항이 쓴 <선운사중신기>에는 중수에 참여하고 당시 선운사에 살고 있던 대중 260여명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찰규모와 조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1707년에는 현익이 <도솔산 선운사창수승적기>를 지었다. 1839년(헌종 5) 비로인해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에 찬성ㆍ의홍ㆍ성찬 등이 법당과 향운전을 수리하고 정문의 기와를 갈았는데, 1840년 가을에 중수를 마쳤다. 이때의 중수내역을 기 정진이 <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에 기록하여 남겼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로부터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선운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이를 요약하 면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정면 5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는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재로는 보물 제279로인 금동보살좌 상,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인 영산전목조삼존불상ㆍ삼존불좌상ㆍ보살입상ㆍ아미타삼존상ㆍ십육나한상ㆍ판관상ㆍ녹사상ㆍ사자상ㆍ십대왕상ㆍ동자상ㆍ호법신장상ㆍ팔상전석가불 좌상 등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9호인 석탑, 제31호인 범종, 제32호인 중종과 부도ㆍ탑비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중에서도 금동보살좌상과 지장보살상등은 미술사적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동불암의 마애불상은 높이 13m, 너비 3m나 되는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와 탑비 중에는 김정희 쓴 백파대사사적비와 채제공이 쓴 설파대사사적비가 있고, 절 아래 마을 입구의 오른쪽 밭 가운데 <선운사동구>라는 시를 새긴 서정주의 시비가 서 있다.
이밖에도 절 주변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당황하여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 조망이 뛰어난 만월대,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19세기 전반기 까지는 이 절에 속한 산내의 암자가 무려 50여곳이나 있었다. 곧,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상도솔ㆍ기출암ㆍ천리암ㆍ수선암ㆍ연대암ㆍ성대암ㆍ수다사ㆍ동암ㆍ도성암ㆍ청풍암ㆍ천등암ㆍ광정암, 1618년에 인해가 창건 한 내원암, 1665년 학철이 중창한 석상암, 1666년에 학철이 창건한 청련암, 1674년에 영조가 창건한 백련암, 1672년 사준이 창건한 상남암, 1676년 처인이 창건한 중남암, 1693년 천성이 창건한 동운암, 1658년 한해인이 창건한 하도솔, 1702년 거사 최대신이 창건한 북도솔, 1699년 명우가 창건한 미륵암, 영조가 창건한 수도암, 1596년 정도암 등이 창건한 고암굴, 1573년 상일이 중창한 은성남, 1574년 상조가 중창한 은적암, 1582년 경신 이 중창한 상암, 1583년 성문이 중창한 월출암, 1575년 철심이 중창한 의경암, 1710년 해운이 머물던 명심암, 1709년 경문이 창건한 한산전, 1707년 지휘가 창건한 백운암, 1713년 태경ㆍ응묵ㆍ봉흠 등이 창건한 성도암 등의 30여 암자와, 이름만이 보이는 20개 암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운암ㆍ석상암ㆍ참당암ㆍ도솔암 등 4개의 암자만 남아 있다. 특히, 도솔암의 내원궁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은 보물 제280호이고, 참당암의 대웅전은 정사각형 맞배집으로 구포장식의 건축양식이 독특한데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