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 제17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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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명 | 금산사 |
대표번호 | 063-548-4441 |
팩스번호 | 063-548-1390 |
홈페이지 | http://www.geumsansa.org |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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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00년에 창건되었다. 즉,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는 그 규모나 사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 인 가섭불 때의 고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 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 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했다. 762년에 시작하여 766년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주존불로 모셨고, 금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존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ㆍ<유식술기>등의 법상종관계 장소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 견훤의 숭봉을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이 1079년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석물인 석련대ㆍ오층석탑ㆍ노주 등은 모두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간경ㆍ법석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창건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대도량이 되었 다. 그러나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에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ㆍ 덕행ㆍ석준ㆍ천정ㆍ응원ㆍ학련ㆍ태전ㆍ운근 등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으로 취임한 용명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ㆍ대장전ㆍ대적광전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에는 성렬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ㆍ미륵전 등을 보 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 도생, 원나라의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의 대가 해원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천여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과 서산의 선지를 이어받았던 태능, 편양파의 후계자인 태우 등이 머물렀다. 또한, 포광이 지은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 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 또는 사주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 1902년에는 섭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1899년에는 포운ㆍ혜은 등이 가운루ㆍ우화루ㆍ동별실ㆍ적묵당ㆍ연지암ㆍ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901년에는 만선과 추산이 운수암의 해운루를, 1902년에는 연수전을 건립하였으며, 1904년에는 포운 등은 금당을 중수 하였다. 1906년에는 안동ㆍ예안ㆍ의성ㆍ지례ㆍ선산ㆍ금산ㆍ용궁ㆍ비안ㆍ군위ㆍ의홍ㆍ청송ㆍ진보ㆍ순흥ㆍ봉화ㆍ영천군 등에 있는 사찰의 관리를 종무원으로부터 부여받았으며, 1912년에는 30본산의 하나로 되었다. 1913년 2월 사찰령에 의해 고운사 본말사법이 시행되면서 경상북도내의 46개 사찰을 말사로 관장하였다. 1924년에는 주지 만우가 약사전을 중수하고 대정암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에는 주지 영호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운교를 만들었다. 1936년에는 명부전과 선열암을 중수하고 천왕문을 이건하였다. 또한, 1934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안동포교당ㆍ와룡포교당ㆍ의홍포교당 등을 두었다. 30본산 당시의 사재로는 논 6만 3664평, 밭 17만9634평, 대지 942평, 사사지 4,189평, 산림이 260정 3반이었다.
이 절의 유물ㆍ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뒤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ㆍ봉천원ㆍ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 년 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이 재건되었고, 나머지 사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월주가 주지로 취임한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약 500m밖에 위 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ㆍ보제루ㆍ미륵전ㆍ대적광전ㆍ대장전ㆍ명부전ㆍ승당ㆍ서전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석조유물로는 보물 제 22호인 노주, 보물 제23호인 석련대, 보물 제24호인 혜덕왕사진응탑비,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 보물 제26호인 석종,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 보물 제28호인 당간지주 등이 있다. 이 중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로부터 미륵본존을 봉안 했던 금당이다. 신라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 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건물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수계ㆍ설계ㆍ설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병화에 소실된 뒤 1635년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 어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과 보주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전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ㆍ아난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에 비구니 만택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 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일주문은 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하였으며, 금강문은절로 들어가는 두번째의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와 강설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당우로는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이 있다.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오인하는 수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 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으 정중탑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