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교구본사

제6교구 마곡사
교구 제6교구
사찰명 마곡사
대표번호 041-841-6221
팩스번호 041-841-6227
홈페이지 http://www.magoksa.or.kr
주소
  • 지번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 도로명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의 본사

이곳의 물과 산의 형태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ㆍ<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가지설이 있다. 첫번째설은 640년(선덕여 왕 9)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이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전 2백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ㆍ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물과 산의 형태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ㆍ<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가지설이 있다. 첫번째설은 643년(신라 선 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하사받은 2백결(결:통일신라부터 쓰던 토지의 면적단위, 1등결=3025평)의 전탑을 기반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낙성식 때 자장율사의 법문을 듣기 위해 온 사람 들이 마치 '삼대(麻)처럼 무성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마곡사(麻谷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 후에는 신라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이곳도 약 200년 가량 폐사된 채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 그 뒤 고려에 들어서서 1172년(명 종 2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도둑떼를 몰아내고 절을 되찾았으며, 제자 수우스님과 함께 왕에게 전답 200결을 받아 대규모로 절을 중창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이 당우가 소실되어 그 뒤 60년 동안 폐사된 채 방치되다가 1651년(효종 2년) 대웅전,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건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에 따라 충청남도의 100여 사암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구한말에는 민족의 지 도자 김구 선생이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중위 스치다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탈옥한 뒤, 이곳에서 출가하여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지낸바 있다. 지금 대광보전 앞에 있는 향나무는 당시 김 구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현재 마곡사는 대전광역시를 비롯해서 충청남도 일대 70여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마곡사에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01호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802호 대광보전, 보물 제800호인 영산전 외 충청남도 문화 재자료가 다수가 있다. 또한 보물 제269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제270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6, 보물 제799호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 제1260호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등이 있다.

이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 해서 백일기도 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한다. 부속암자로는 심정암ㆍ부용암ㆍ북가섭암ㆍ토굴암ㆍ백련암ㆍ영은암ㆍ대원암ㆍ은적암등이 있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라 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