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 제22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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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명 | 대흥사 |
대표번호 | 061-534-5502 |
팩스번호 | 061-535-5357 |
홈페이지 | http://www.daeheungsa.co.kr |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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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지>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 아도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 875년에 도선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ㆍ총은ㆍ성유 등 세 승려의 부도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라 보고 자신의 의발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4년(선조 37)에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의 강압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뒤 1665년(헌종 6)에는 심수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에는 표충사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에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에 완호와 제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속에서 수많 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와 13대강사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 담론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던 삼우, 화엄의 도리와 백 가에 통달하였던 도안, 육신보살로 칭송받았던 문신, 계행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봉,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 대흥사의 정진당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 다선일미 사상으로 이름난 의순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서 원오ㆍ광열ㆍ영우ㆍ승제ㆍ성규ㆍ정일ㆍ태관ㆍ행인ㆍ복혜ㆍ윤우ㆍ시연ㆍ혜장ㆍ각안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ㆍ나한전ㆍ시왕전 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고, 남원은 극락전ㆍ대장전ㆍ지장전 등 12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 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 대흥사의 현재의 사역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 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의 북쪽에 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고 지금도 남원ㆍ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ㆍ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과 남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가 중건하였던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 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을 뿐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ㆍ세진당의 승사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에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 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 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중”이라 하여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의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93호인 용화당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 면에는 가허루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을 말하여주는 대표적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과 처영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전라남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 우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과 조사당, 정면에 삼문,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이 있다. 또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을 보관하는 보장각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669년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의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ㆍ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보장전에는 선조 의 하사품인 옥발ㆍ비취옥발ㆍ수저ㆍ금란가사ㆍ금자병풍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ㆍ교지ㆍ신발, 초의가 그린 관음도, 대광명전상량문, 승군단 표지물, 철제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94호인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 300m지점에 있으며, 조선 후기에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고 정자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 자체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이 영정을 봉안한 전면 9칸의 보련 각과 요사채가 있다. 이밖에도 사천왕을 봉안한 천왕문과 대흥사 역대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