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 제21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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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명 | 송광사 |
대표번호 | 061-755-0107 |
팩스번호 | 061-755-0408 |
홈페이지 | http://www.songgwangsa.org |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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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18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자를 ‘18공’이라고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광포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국사전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라고 풀었다. 김영수는 이 산에 ‘솔갱이’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던 것이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과의 ‘광’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와 <보조국사비명> 및 <승평속지>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가 중창하려는 원을 세우고 역부를 소집하고 임목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그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를 옮겨옴으로써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수행결사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을 지어 정혜결사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가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고, 그때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 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불ㆍ법ㆍ승의 전당을 중건하였고, 정종은 수륙사를 중창하도록 윤지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의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 란으로 수각ㆍ임경당ㆍ보조암ㆍ천자암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하였다. 이에 응선을 수각과 천자암과 보조암ㆍ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를 모셨다. 부휴는 제자 4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과 동행랑,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 5개소, 승료 8옥, 공사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 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ㆍ경판 및 외향각의 유조, 창고에 있는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과 용운은 대웅전ㆍ명부전ㆍ응향각ㆍ법왕문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는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1290냥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등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ㆍ장탄문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 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ㆍ25사변으로 조계산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사찰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고, 공비들은 사찰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사찰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1년 사이에 취봉과 금당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이 설법전ㆍ수선사ㆍ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을 부활하여 수선사으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1983년부터 주지 현호가 대웅보전ㆍ지장전ㆍ승보전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재건된 건물을 합하면 약 50여동의 대사찰로서 그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ㆍ25사변 전만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ㆍ해청당ㆍ행해당, 서쪽의 문수전ㆍ임경당ㆍ도성당이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동구에서 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을 비롯하여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노비첩과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4호인 경질과 보물 제175호인 경패, 보물 제176호인 금동요령 등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는 제18호이니 자정국사사리함, 제 19호인 은견난사, 제22호인 송광사금강저, 제28호인 고봉국사주자원불, 제30호인 팔사파문자 등이 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않는 신비성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암자들은 폐허가 된 채 유지만 남아 있거나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에 있다. 현재 수행승이 거처하고 있는 암자는 천자암ㆍ부도암ㆍ감로암ㆍ불일암뿐이다. 이밖에도 유지만 밝혀진 암자로는 광원암ㆍ청진암ㆍ목우암ㆍ실상암ㆍ판와암ㆍ상선암ㆍ자정암 등이 있고, 보조암ㆍ은적암ㆍ조계암ㆍ묘적암 등은 이름만이 전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