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에 와서도 불교 탄압은 강화되어 7종단이 선과 교 양종으로 통폐합되고 소속 사찰 수도 축소되었다. 선종에는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여 천태종, 총지종을 하나로 묶어 흥천사를 본사로 하고, 교종은 화엄종과 자은종 등을 합하여 흥덕사를 본사로 하였다. 세종은 왕후가 죽은 뒤 불교를 믿게 되어 궁궐 안에 불당을 세우고 한글 창제 뒤 가장 먼저 수양대군에게 부처님일대기인 『석보상절』을 간행케 하였으며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그러나 교조적인 유학자들로 채워진 조정 대신들은 세종의 한글 창제는 물론 불교 신봉을 격렬히 성토하였다.
조선 초기에 불교계는 보우국사와 나옹대사의 법손들이 주로 활약하였다. 무학대사의 제자인 함허스님은 왕실에 『전등록』을 강의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려 후기 태고국사의 법맥은 환암혼수 – 구곡각운을 거쳐 벽계정심에 이어졌는데 벽계스님은 연산군대에 법난을 피해 황악산 쌍림사에 은둔하고 벽송지엄(1464~1534)과 수미에게 법을 전했다. 벽송스님은 대혜와 고봉의 어록을 보고 크게 깨달았으며 부용영관에게 전법하였다. 부용영관(1485~1574)은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에게 법을 전하였다. 청허대사가 바로 서산스님이다.
연산군ㆍ중종 대에 불교는 더 가혹한 법난을 당했다.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고 스님을 찾아내어 강제로 환속 또는 노역시켰다. 그러나 명종 대에 독실한 불제자 문정대비가 섭정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불교의 명맥이 회복되었다. 조정은 보우(普雨)대사에게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라는 최고 지위를 부여하고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삼아 승과를 부활하여 서산, 사명 대사와 같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문정대비가 죽자 곧 조정 대신들은 보우대사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살해한다. 보우대사는 조선조 불교 중흥의 순교자였다.
서산(1520~1604)대사는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중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아 부용스님의 인가를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국가의 위기에서 서산대사에게 구원을 청했다. 당시 대사는 73세였으나 전국 산사로 궐기문을 돌려 의승군 5천여 명을 모아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조의 가혹한 억압에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승가는 외적의 침략으로 국가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의승군(義僧軍)은 평양성 탈환에 선봉이 되었고, 행주산성전투와 금산전투, 그리고 청주성 탈환, 수군 지원과 보급, 외교 활동에 큰 성과를 거두어 조정대신은 물론 명군 대장도 서산대사를 비롯한 의승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그 결과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조정에서는 의승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 의승군으로 하여금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 전국 주요 산성을 보수하고 지키는 책임을 맡기게 된다. 이렇게 조선 중기에 불교는 억불정책으로 산중에 은거하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구국 의승 활동으로 역할을 되살리게 된다.
한편, 조선조는 신분제 사회로 양반들이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일부 불교를 신봉하는 재가불자들도 있었다. 율곡 이이도 젊은 시절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가 환속하였고, 『홍길동전』의 허균(1569~1618)도 집에 불상을 모시고 참선수행을 행하였는데, 달마대사와 유마거사를 존경했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해동의 유마거사’를 자처할 정도로 선에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고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추사거사는 백파, 초의 선사와도 깊이 교류하였다. 추사의 사상은 수많은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유대치와 오경석 같은 중인 신분의 개화사상가들로 이어졌다.
또한, 조선이 통치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서양 열강과 일본이 식민지 개척에 나선 개화기에 산중에서 조용히 앞날을 보고 새 시대를 준비한 고승이 바로 경허(1846~1912)스님이다. 스님은 동학사 강사를 하다가 강원을 파하고 혼자서 화두 참구에 전념하여 마침내 깨달았다. 경허스님은 깨달음 이후 자신의 법맥을 태고 – 서산 – 환성지안으로 이어진 조계종 법맥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천장암과 수덕사 일대에서 혜월, 수월, 만공스님 같은 훌륭한 고승을 배출한 뒤 1899년 가야산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수선결사를 추진하여 선풍 진작을 모색한다. 그 뒤 범어사, 통도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법주사 등 영호남 주요 사찰의 선원을 재건하였다. 이때부터 산중에 다시 선풍이 살아나게 되었다.
경허스님 이후에 용성(1864~1940)스님이 불교 중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용성스님은 각고의 정진 끝에 깨치고 자신의 법을 역시 조계종 태고 – 서산 법맥의 환성지안스님에게 원사(遠嗣)하였다. 스님은 만해와 함께 불교계 대표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후 경전 한글화와 찬불가를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선원에서 수선결사도 추진하여 선풍을 진작코자 하였다.
개화기의 경허ㆍ용성 스님의 활약으로 불교와 조계종은 다시 부흥의 기반을 다졌고, 배출한 후학들은 경허법맥과 용성법맥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왕실은 개화기에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일본 불교까지 진출하여 포교를 하자 불교에 대한 정책을 전환하여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우고 사사관리서를 설치하였다. 사사관리서는 조선의 통치력 한계로 인하여 흐지 부지 되고 원흥사만 남았는데 여기에 선각자들이 불교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세우니 이것이 지금 조계종 종립 동국대학교이다.
1908년에 불자들이 결집하여 서울 사대문 안에 첫 포교당을 세우니 각황사다. 1910년에는 서울과 이북 사찰 대표를 중심으로 종단 재건을 추진하였는데 그 이름은 원종(圓宗)이었다. 영호남 사찰에선 태고국사가 중국 임제종 법맥을 이어온 것을 이유로 원종을 반대하고 임제종(臨濟宗)을 내세웠다. 이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이 일시 대립하나 일제는 이를 모두 거부하여실현되지 못했다.
일제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점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불교 관리를 위해 ‘사찰령’을 만들어 한국불교를 30본사로 나눈 뒤 나머지 사찰은 그 말사로 편입하여 총독관장 아래에 두었다. 일제의 식민지불교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帶妻) 풍조가 한국불교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국불교는 전래 이래 1600년 이상 청정 비구ㆍ비구니 승가의 전통을 지켜왔다. 조선조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이 유지되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일부 승려들의 파계행(破戒行)과 이를 방조하는 총독부의 정책으로 한국불교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용성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은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의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 승려의 대처를 조장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승려들이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세속화가 한국불교계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사찰 일각에서 오로지 정진만 하던 선승(禪僧)들은 부처님의 정법과 계율을 지키며 살고자 하였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에 선승들은 뭔가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선승들이 서울에 자주적인 수행도량을 창건하니 이것이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이다. 선승들이 이 도량을 원(院)이라 한 것은 ‘사(寺)’라 붙이면 ‘사찰령’의 통제를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1935년경 일본불교계가 총독부와 협의하여 한국불교를 통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반대하여 한국불교 지도자들은 서울에 총본산 건립을 추진하였다. 1937년 30본산 주지들은 회의를 열어 월정사 주지 지암스님을 대표로 선출하고 총본산 건설을 본격화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8년 10월에 한국불교 총본산 태고사(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을 낙성하였다. 1941년에는 태고사 대웅전을 총본사로 하고 일본과 중국에 없는 우리 고유의 조계종(曹溪宗)을 종명으로 한 조선불교조계종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교단이 강제 해산된 이후 실로 수백 년 만에 합법적으로 조계종을 재건한 것이 된다. 이를 기반으로 불교 지도자들이 오대산 도인 한암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초대 종정 한암스님은경허스님에게 전법 인가받은 선교율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이렇게 하여 비록 일제강점기이지만, 한국불교도의 오랜 숙원이었던 합법적인 교단 조계종 재건이 성취되어 수행종풍을 진작하고 전국 사찰의 재산과 문화유산 관리의 자주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