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면 불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다. 821년 우리 조계종의 종조로 추대된 도의(道義)국사가 당나라에 구법 유학 중 조사선(祖師禪)을 체득하여 귀국한다. 스님은 화엄사상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 갔으나 중국에는 이미 달마대사에 의해 알려진 선의 가르침이 혜능대사에 이르러 조사선의 모습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혜능대사는 중국 남쪽 광동성 조계(曹溪) 보림사(지금의 남화선사)에서 오랫동안 교화하였는데 스님의 어록이 『육조단경』으로 정립되어 천하에 조사선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선문(禪門)에서는 혜능대사의 선을 조계선(曹溪禪) 또는 남종(南宗) 돈오선(頓悟禪)이라 하는데, 북쪽에서 선법을 펼친 신수대사의 점오(漸悟) 북종선(北宗禪)과 대비되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북종선은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중생이 열심히 닦아서 깨달음을 점진적으로 성취한다는 입장이라면 혜능대사의 남종선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중생이 착각만 깨면 단박에 부처가 된다는 돈오의 입장이다. 신수대사와 혜능대사 당대에 북종선은 당나라 수도인 낙양과 장안 일대에서 주로 융성하여 신수대사가 3대 황제의 국사(國師)로 추앙될 정도로 화려한 전성기였으나 남종선은 남쪽 광동성 일대에서나 알려진 변두리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혜능대사의 돈오사상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면서 제자 대에 이르면 북종선은 거의 남종선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리고, 남종선은 더욱 더 확산되어 신라와 일본, 베트남까지 전파되어 선종의 시대를 열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혜능대사는 많은 전법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남악과 석두선사 아래 마조와 청원이라는 걸출한 선사가 나와서 선종의 황금시대를 열게 된다. 당시 마조 대사는 강서성, 석두대사는 호남성에서 크게 교화하여 기라성 같이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흔히 사용하는 ‘강호제현(江湖諸賢)’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신라의 도의스님이 중국에 유학 갔을 때가 바로 이 시대였다. 도의스님은 조사선을 만나 새로운 발심을 하여 머나먼 조계 보림사로 가서 육조의 조사당을 참배하였고 『육조단경』 설한보단사에서 수행하였다. 그 뒤 마조선사의 상수제자인 서당선사와 백장선사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아 조사선(祖師禪)을 체득하고 821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것이 혜능대사의 조계선(曹溪禪)이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인연이고 지금 우리 대한불교조계종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821년 도의선사가 체득하여 돌아온 조사선(祖師禪)은 교학이 융성했던 신라불교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양무제가 말길을 알아듣지 못하자 숭산 소림사 달마굴에서 9년 동안 은둔한 흐름과 비슷하다. 도의선사도 경주로 가지 않고 산간벽지인 북산(설악산)으로 들어가 시절인연을 기다렸다. 이때의 분위기는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21년에 도의스님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서당의 심오한 종지를 보았다.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와 비등해서 돌아왔으니 처음 선종을 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으로 분주한 망상에 사로잡힌 무리붕 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큰 뜻을 꾸짖었다. 이미 암송하는 데만 마음이 쏠려 다투고 비웃으며 마구니의 말이라 하는 까닭에 빛을 지 아래 숨기고 종적을 깊은 곳에 감추었다. 신라의 왕성으로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설악산)에 은거하였으니... 꽃이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매 개미가 고기 있는 곳에 모여들 듯이 도를 사모하여 산을 메웠으며, 교화를 받고는 마침내 기러기처럼 산을 나섰으니 도는 인력으로 폐지할 수 없는 때가 되어야 마땅히 행해지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도의선사는 신라에 선법(禪法)을 전하려 했으나, ‘마구니 말’이라 비난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선에서는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이 바로 극락이라 보고 자기 마음을 바로 보면 단박에 부처가 된다” 하니 그동안 ‘중생이 열심히 닦아 깨달아야 부처가 된다’고 가르친 교학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이러한 비난도 당연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에 도의선사는 달마대사처럼 산으로 가서 때를 기다렸다. 그때 염거화상이 찾아가 법을 물어 깨치고 인가를 받아 마침내 해동 2조가 되었고, 염거화상은 보조체징 선사에게 법을 부촉하여 3조로 삼았다. 보조선사는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산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 중 장자산문인 가지산문이다. 이러한 법연으로 도의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모셔지게 되었다.
도의선사가 귀국한 5년 뒤에 조사선을 체득하고 귀국한 스님이 홍척대사이다. 홍척대사는 지리산 실상사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실상산문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 선법을 체득한 선사들이 속속 신라로 돌아와 전국 각지에 산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가지산문과 실상산문 외에도 혜철선사의 동리산문이 동리산 태안사, 심희선사의 봉림산문이 봉림사, 낭혜선사의 성주산문이 보령 성주사, 범일선사의 사굴산문이 강릉 굴산사, 철감선사의 사자산문이 화순 쌍봉사와 영월 법흥사, 지증선사의 희양산문이 문경 봉암사, 이엄선사의 수미산문이 가장 늦게 해주 광조사에 각각 개산하였다. 구산선문 이외에도 진감선사의 쌍계사, 순지선사의 서운사, 보양선사의 운문사 등에서 선을 전파하였다.
선문(禪門)은 대부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들어섰다. 그 이유는 왕궁이 있는 경주에는 교학이 득세하고 있던 현실과 지방 호족들이 선에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과 귀족은 지배층으로 부처와 중생을 분별하는 교학에 익숙해 있었으나 지방 호족들은 지역에 상당한 권세를 행사했지만 중앙 귀족계급으로부터 차별 받는 풍조가 있어 중생이 본래부처라는평등의 선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후원하였다.
선의 전래 초기에 호족의 호의로 지방에서 활동하던 선사들도 점차 선의 독특한 가치가 경주로 알려지자 왕실과 귀족층도 인식이 바뀌어 선사들을 후원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면 선종이 불교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국왕에 의하여 화엄종 보림사가 선종으로 바뀐 것이 그 상징적인 사례다. 선은 전래 초기 배척 받던 분위기에서 어느 새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은 구산선문의 선사들을 생불(生佛)로 추앙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최치원이 지은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선사들은 “덕이 두터움은 중생에게 부모가 되고, 도의 높음은 국왕에게 스승이 되었다.” 선사들의 활동으로 “선정의 숲이 신라에 무성하고 지혜의 물결이 이 땅에서 편하게 흐르게 되었다.”
구산선문의 선사들은 위로는 국왕,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두루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선사들이 입적한 뒤에도 그 덕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철감선사의 쌍봉사 부도, 지증대사의 봉암사 탑비, 보조선사의 보림사 탑비와 부도 등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