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 초기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순도스님에 의해서다. 소수림왕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불교를 수용하여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다. 391년 국민들에게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고구려 최초의 절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이며 처음에는 인과(因果)를 배워 복을 빌고 선업(善業)을 지으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광개토왕 때에는 평양에 절 아홉 곳을 창건하였다. 5세기에 조성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불상과 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7세기 중반에는 고구려의 요동 지역에 불상과 탑이 세워졌으니 불교가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5세기경에는 고구려 스님들이 중국으로 구법 유학을 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승랑(僧朗)은 승조(僧肇)의 삼론학을 연구하여 대가가 되었다. 중국에서 삼론, 천태, 율장을 배워온 고구려 스님들은 일본에도 불교를 전하였다. 595년 혜자대사는 일본으로 가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어 불교를 가르쳤다. 담징은 학문에도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나 일본 법륭사에 머물며 금당 벽화를 그려 아름다움으로 찬탄을 받았다. 혜관대사는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의 여러 스님들도 고구려에 유학 와서 불교를 배워가는 등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구려 후기 영류왕과 보장왕(642~668) 때에는 왕이 도교(道敎)를 신봉하여 절을 빼앗아 도교사원으로 만들어 불교계의 반발이 일어났다. 당시 고승 보덕대사는 왕에게 여러 차례 도교가 성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백제로 망명하였다. 또 다른 고승 혜량스님은 고구려 멸망 직전에 신라로 망명하였다.
백제는 384년에 중국 진나라 마라난타대사가 불교를 전해 주었다. 왕은 대사를 모셔 예경하였고 이듬해에 출가자가 10명 나왔다. 392년 아신왕은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도 불교 사상과 문화로 국민들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526년에 백제 겸익(謙益)스님은 인도에 가서 범본 오부율을 가져와 번역하였고 인도 스님도 같이 와서 번역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에는 계율학이 발전하여 일본에까지 전해주었다.백제의 역대 왕들은 불교를 신앙하였으며 무열왕릉에도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왕 때인 541년에 중국 양나라 무제가 사신을 보내 『열반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전해주었다. 이후 천태와 삼론학이 발전하여 많은 고승들이 불법을 가르쳤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과 백제대향로를 보면 백제 불교문화의 아름다움과 융성함을 알 수가 있다. 백제에는 6세기 이후 미륵신앙이 성행하여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탑을 조성하였다. 지금 전하는 사지의 규모로 볼 때 미륵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백제의 불교 사상과 문화는 일본에 큰 영향을 주어 일본 고대국가의 이념과 체제 정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02년 백제 관륵대사는 일본으로 가서 승정 (僧正)이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늦은 5세기 중반에 불교가 들어왔다. 신라 법흥왕(514~540) 시대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서야 불교는 공인되었다.
진흥왕(540~576) 대에 불교는 크게 발전한다. 신라 왕실은 왕이 곧 부처라는 입장에서 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556년에 완공된 황룡사는 신라 최대 사찰로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이후 구층목탑을 건립하여 더욱 위상을 드높였다. 이를 통해 신라는 국민을 결집시키고 국운융성을 도모했다. 또한 화랑제도를 도입하여 청소년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역량을 키웠는데, 불교 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는 팔관희, 백고좌희, 점찰회 등 불교문화 행사를 국가적으로 봉행하여 국민 화합을 유지하고 윤리의식을 고취하였다. 신라 불교도 초기에 인과법으로 권선징악과 기복 신앙을 가르쳤다. 불교가 확산되자 스님들의 출가가 늘어나고 중국으로 유학 가서 많은 경서를 가지고 돌아와 불교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화랑의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는 불법 전파 외에 국가 운영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자장율사 또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에 활약한 고승이다. 삼국 중 유일하게 여왕이 통치하였던 신라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과 내부의 반란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자장율사는 불법으로 마음의 평안을 가르치면서도 오대보궁을 조성하고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문수신앙과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게 하여 신라의 불국토사상을 불어넣어 민심을 결집하고 여왕의 통치를 적극 지원하였다. 자장율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역할로 불교는 짧은 기간에 불국토가 되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원효(元曉, 617~686)대사는 삼국의 전쟁과 통일시기의 고승이다. 대사는 중국으로 가던 중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에만 머물렀으나 스님의 명성과 저술은 중국과 일본에널리 알려져 신라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대사는 유학승들이 화엄이나 유식, 계율 등 특정 사상을 전공한 것에 비하여 폭넓게 불교와 인간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여 ‘화쟁(和諍)’이라는 개념 등으로 불교를 발전시켰다.
의상(義湘, 625~702)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을 전파하여 불교를 발전시켰다. 의상대사는 귀국 후 왕실의 시주도 사양하고 부석사를 창건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의상대사의 십대제자로 불리는 표훈, 진정, 오진스님 등이 제방으로 퍼져 사찰을 건립하니 이것이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범어사 등 화엄십찰이다.
통일 이후 신라 불교는 더욱 더 발전해 갔다. 중국에 유학 간 스님들은 화엄사상과 더불어 유식사상을 배워 왔다.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법사에 의해 중국에 소개된 유식사상을 신라의 원측(圓測, 612~696)대사는 더 한층 발전시켰다. 그의 학문과 저술은 중국과 일본은 물론 티베트까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신라불교는 화엄과 함께 유식이 쌍벽을 이루어 교리적인 논쟁도 활발하여 교학의 융성을 이끌었다.
이러한 신라 불교의 교학 융성은 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경론의 간행을 촉진하여 문자와 종이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751년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될 때 석가탑에 봉안한『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교 사상과 문화를 더욱더 발전시켜 삼국 전쟁과 통일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민통합에 노력하였다.
화엄과 유식 같은 불교의 교학은 한문과 경전에 의지하여 공부해야 하는 까닭에 왕실과 귀족층에 국한되어 유행하였고, 일반 국민은 불교를 아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하면 죽어 극락정토에 태어 날 수 있다는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면 액운을 멀리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관음신앙 등이 일반 서민 계층의 환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