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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사회 리더를 위한 선명상 아카데미] 3강 내용 정리(이것 모르면 빌게이츠도 괴롭)
2024-07-11 조회 139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사회 리더를 위한 선명상 아카데미] 3강 정리



<주제: 이것 모르면 빌 게이츠도 괴롭다>




첫 번째 강의를 통해 괴로움이 왜 생기며 업의 현상의 과정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 드렸다.


우리가 보는 눈귀코혀몸, 생각으로 대하는 대상은 과연 진실된 것일까, 한계는 없을까. 나의 즐겁고 괴로운 감정 상태와 내가 지금 대하는 현상, 인식하는 대상 이 두 가지만 어느 정도 알면 스스로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제어할 수 있다.


완전히 제어되면 바로 해탈이다. 바로 부처라고 일컫는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표현은 성불, 중도, 견성 해탈 니르바나 무상정득각 등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괴로움이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사라졌다, 이런 뜻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끝까지 가야 하고 그걸 해야만 모든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오늘은 인과 업식이라고 하는 아뢰야식 12연기적으로 보면 무명, 행, 식 이 세 개가 12개 중 3가지가 전생, 소위 전생이라는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현재 나의 태어나기 전 과거는 모르지만, 그러한 습식 업식이라고도 하는, 그런 것들이 훈습되어 지금 내가 버릇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부모를 닮는다는 것, 우연히 닮는 것이 아니다. 질량이라고 할까요. 소위 업과 나의 까르마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유유상종 되어져 거기에 가장 애착이 붙는다. 이 애착은 그야말로 즐겁고 행복하고 기쁨을 느낀다. 그렇게만 되면 좋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거기에 대한 대가가 따른다. 때로는 가장 애착하기 때문에 가장 힘든 경우가 많다.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감정을 소위 괴로움과 즐거움 고, 락이다.


다만, 그 시점이 다르다. 즐거움이 오는 시점이 있으면 괴로움이 오는 시점이 반드시 있다. 물리적으로도 해가 떴으니 지고 밀물 썰물의 이치처럼 너무 명백한 아무것도 아닌 현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딱딱딱딱 어김없이 일어난다. 현상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상대적인 것이 분명히 있다. 반드시 생로병사 성주괴공 한다. 불교적으로 하면 ‘인연생기’라고 한다. 이 부분을 여실하게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봐야 이 현상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연한 소치, 필연적인 결과, 그야말로 산은 산 물은 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안 그렇지 못하다. 사사건건마다 보는 것 들리는 것 모두에게 나의 소위 인식이 미쳐서, 결과적으로는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고 즐거움을 얻으므로 해서 괴로움을 동시에 얻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현상적인 윤회도 있고 현상을 보는 나의 마음 고락적인 윤회도 있는 것이다. 쌍방 간에 돌아가는 것이다.


먼저 질문을 드리겠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수 천 년 수 만 년 살아오며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급속하게 과학문명이 발전되어 가고 있고 AI 시대까지 왔다. 이대로 발전하면 다 공중에서 떠서 살 게 될 것이다. 도로가 없어질 것이다. 자동차, 배 모두 없어지고 다 공중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 옛날 자장율사께서 유체이탈 몸은 그대로 있고 영혼만 빠져나가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그 이상이다. 그렇게 되면 육체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보려고 하니 눈이 생기고 들으려고 하니 귀가 생기듯, 필요 없어지면 퇴행해 사라진다. 몸이 필요 없는 시대가 생길 것이다. 물리적인 내 몸을 안 가지고도 나의 식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굳이 내 몸을 동반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면 내가 가서 내 볼일을 다 볼 수도 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식’만 갖고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백만년 살아오며 뭔가 인간이 원하는 것들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괴로움이 없어졌나요. 그렇게 애쓰고 발전해 왔음에도 나의 근심, 걱정, 괴로움, 고통, 이것이 인간들에게서 없어졌나요. 이것은 괴로움과 별개로 인간의 욕심의 산물일 수 있다. 발전, 문명 새로운 문명이 계속 진보되는 것도 인간의 욕심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더 행복해지려하고 괴로움을 없애려 노력했지만 과연 없어졌을까요.


불교는 정토교라는 감성적 종교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다. 안다고 더 괴로움이 없어지고 모른다고 더 괴로울까요. 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또 하나,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정치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알 수 있는가. 과연 이런 것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 일까요. 모르는 대목이 있지 않을까요.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결과를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고는 내 문제다.


돈이 많거나 권력을 얻거나 하물며 종교, 수행자라고 해서 명예나 권력이 높다면 괴로움이 없을까. 택도 없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된 상황, 이런 것들이 결과물로서 현상적으로 인연 지어질 뿐이지 명예나 권력이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적인 인과, 업이 따른다.


괴로움이 왜 생기는지 그 원인과 실체를 모르고는 절대 괴로움을 없앨 수 없다. 과연 현상이 문제일까요. ‘이 사람 좋다 싫다’, ‘이 일은 옳다 그르다’를 비롯해 눈으로 보는 현상, 귀로 듣는 현상, 코로 듣는 현상 몸으로 느끼는 현상, 머리로 생각하는 현상 불교에서는 육근에 의한 눈과 눈에 보이는 것, 귀와 들리는 소리, 이것이 나의 경험에 의한 나의 생각을 얹어버리는 것이 육식이다. 합쳐서 18계라 부른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들은 18계 안에 모두 들어가 있다.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의 인식과 나의 좋고 싫은 감정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무너져도 내가 문제의식이 없고 편안하다면 상관 없다. 그러나 세상이 평화롭고 극락이고 천국이라도 내가 슬프고 괴로우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나로 귀결된다. 각자 가진 고락의 업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현상은 허구다. 부처님께서는 단적으로 <금강경>에서 공이라고 했다.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현상을 보고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다. 실체 없는 현상을 실체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야, 집착하지 않아야 괴로움이 덜 생긴다.


서양의 철학자들을 분석해 보니 모두 불자나 다름 없다. 현상에 대해 불교 유식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의 물을 볼 때도 입장에 따라 네 가지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천상인들은 물을 보석으로 본다고 하고,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본다. 만약 우리 말고, 관점은 다르지만 안이비설신의로 보지 않고 다른 어떤 존재가 본다면 이 우주가 어떻게 될까. 짐승들도 보는 세계가 다 다르다.


안이비설신의 눈귀코혀몸 말고 다른 존재가 우주를 어떻게 볼까. 사물 자체를 우리처럼 볼까. 영혼이라는 것이 대두가 된다. 몸은 없지만 식견, 업식 이런 것들이 존재할까 하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인연생기 해서 모든 물체는 원자로 구성돼 있다. 더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서 이합집산하고 인연이 되어서 사람 모양도 되고 산도 되고 물도 되고, 이 실체는 모든 물체는 물리적인 것들은 알갱이의 모임이다.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였을 뿐이지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인연생기’ 한다고 보는 것이다. 생로병사 성주괴공하며 이런 형태 저런 형태 이런 물건 저런 물건이 생기고 당연히 인연생기한다. 연기 한다고 보는 것이죠. 다만 생로병사 성주괴공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원자라는 작은 알갱이마저도 더 쪼개면 없다. 제로가 아닌, 숫자 1이 생기는 즉시 2가 생기고 3이 생긴다. 반대로 -2, -3도 자동으로 생긴다. 계속 쪼개질 뿐이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큰 것도 마찬가지다. 1,2,3에서 시작해 끝까지 가다 보면 경까지 올라가도 한계가 없다.


현상이라는 것도 서로 비교해서 생겨난다. 그냥 보면 그냥 보이는 것이지만, 저 위를 가리키면 아래가 생긴다. ‘크다’ 하면 곧바로 ‘작다’가 생긴다. 실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크다 작다, 함부로 논할 수 없다. 모든 현상은 비교, 상대적이다.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 과학이 발전해도 발전한 그 상태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발전해야 알 수 있듯이, 현상은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1초, 찰나, 겁으로 계산한다.


찰나찰나 이 순간, 눈 한 번 깜빡할 찰나 이미 현재라고 하면 과거가 되어버리고 미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착각할 뿐이다. 일념즉시 무량겁이라고 한다. 한 생각 안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찰나찰나 속에 들어가 있다. 과연 상상을 할 수 있을까요.


수만 가지 조건들에 의해 하나하나의 결과들이 나타난다. 옳게 보든 그르게 보든 그 자체도 연기의 현상이다.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인연, 연기, 인과작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중무진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도 생로병사 돼 버린다. 성주괴공 해 버린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뭘까요. 나의 괴로움이다. 그냥 지나갔으면 하지만 쉽지 않다. 시간적으로는 중첩에 중첩을 해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한다.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면서 계속 양중, 겹치고 겹친다.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가 계속 겹친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육경으로 보는 현상이 있다. 이것으로 대상을 본다.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데, 색, 소리, 향기(냄새), 맛, 몸으로 느끼는 촉감,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는 생각한다고 한다. 과거의 것들을 경험적으로 누적된 것이 나타나는 것이 생각이다. 색성향미촉법 6경,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 소리로 큰 소리 구나 작은 소리구나, 그것을 내가 인식하는 것을 육식이라고 한다. 모두 3개를 합쳐 18계라 한다. 눈귀코혀몸 여섯가지 감각기관에 색, 소리, 냄새, 맛, 몸으로 느끼는 색성향미촉법이 만나 육경과 육식이 만나 18계라고 하는 18가지 안에 이 모든 존재 현상이 다 들어 있다는 뜻이다.


만법 유식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색 즉, 현상을 보니 결국은 ‘공’이다. 우리가 보는 현상, 인식, 감정은 1이라는 숫자 있음 존재, 1이 있음으로 2,3,4가 생기는데 영원히 제로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잘게 쪼개도 없어지지 않는다. 더 잘개 원자, 분자, 소립자 미립자로 더 작아질 뿐이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현상이라 한다. 여기에서 빠져나온 것이 제로이자 공이다. 고락이라고 하는 즐겁고 괴로운, 행복하고 불행한 두 가지 양면성 필연적 양면에서 빠져 나온 것이 바로 제로이다. 제로에는 무엇을 붙여도 붙일 수가 없다. 선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한다. 이것이 깨침, 깨달음이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도 나는 조금도 괴로운 마음이 안 생긴다. 벼락을 맞더라도 벼락을 맞는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괴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고락이라고 하는 업을 없애야 한다. 하지만 잘 없어지지 않는다. 도저히 깰 수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완전히 박살내는 것을 ‘선’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제로가 되고 해탈, 니르바나, 성불, 견성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신구의 몸으로 하는 행동이나, 말로 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이것이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걸림이 없어진다. 의업 청정한 생각, 신구의 삼업 청정이라 한다. 지금이라도 고락이라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시작하는 것이 선명상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시끄럽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고, 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걸으면서 하든 방법은 자신에게 맞게 하라. 이 현상을 결과적으로는 나의 고락에 업식 나에 저장된 경험적 소위 아뢰야식이라 하는데, 잠재의식 속에 있는 내가 가진 즐겁고 괴로운 업덩어리에 의해서 이 현상이라는 것도 동시에 인연되어진다. 내가 가진 안이비설신의라 하는 육식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하니, 내가 보고 듣는대서 나의 고락이 즐겁고 괴로운 것들이 정해진다. 이것을 줄탁동시라 한다.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나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없애서 결국에는 괴로움의 업식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 이뤄지는 인식의 최고 단계를 말한 플라톤도 불자다. 경험의 세계를 넘은 인식의 최고 단계가 바로 해탈, 열반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불성을 알아야 한다. 니체 또한 모든 사건은 무한히 반복된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철학의 끝판왕이라 하는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했다.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요, 선이다.


(사진, 내용 정리: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