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사회 리더를 위한 선명상 아카데미] 2강 정리
<주제: 나의 미래를 내가 알아내는 과학적인 방법>
감정과 생각, 인식을 통틀어서 마음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경전이나 논서에서도 그 부분을 강조했다. 원래 불교는 고를 멸하려고 생긴 종교다. 부처님께서 출가한 이유를 떠올려보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태자시절 사문유관이라고 해서 성문을 다 나가봤다. 동문에 나가 보니 지팡이 짚고 힘겹게 걷는 노인을 봤고 남쪽으로 가서 병자를 봤다. 서쪽으로 가서 시체를 봤고, 북쪽에서 수행자를 봤다. 사문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본 셈이다. 그래서 이런 고통과 괴로움이 왜 오는지 고심했고, 그래서 출가를 하신 것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성제를 말한다. 결국 고통과 집착, 이를 없애는 것, 없애는 방법 4가지이다. 고는 괴로움이고, 괴로움은 감정이다. 내가 기분이 나쁘거나 힘들거나 어렵거나 하는 모든 것을 느끼는 게 감정이다. 그걸 통틀어서 괴로움이라고 한다. 4고8고라고 한다. 여기서 집제는 집착이다.
내가 왜 괴로운지 알아야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도 알 수 있다. 기분 나쁘면 소리를 지르거나, 겨우 하는 게 소리 지르는 것, 기분을 되돌리기 위해, 스트레스 트라우마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지만 그런 것은 일시적이다. 약을 먹거나 수술하거나 정신적 치료를 받는 게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괴로움을 없애거나 조금 늦추는 방법이다. 괴로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완전히 없애진 못한다. 불가능하다.
완전히 없애고 몸을 다한 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오백나한처럼 마음을 깨친 분을 빼고 좋게 세상을 떠나는 예가 없다. 귀신과 영가가 될 것인데, 그 또한 감정덩어리다. 그래서 우리 중생을 유정이라고 한다. 유정(有情),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돌아가서 부처님께서 출가한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 즐겁기 위해, 뭘 얻기 위해 출가한 게 아니다. 카필라국이라는 작은 나라지만 명색이 왕자 아닌가. 보통 사람이 갖출 수 없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출가한 것이 아닌가. 지금 겉으로 보기에 잘 산다, 돈이나 있고 권력이 있다. 아이큐 좋다 등 조건이 좋은 사람은 일시적이고, 금생에 끝나버린다. 금생에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 노력 없이, 부모 잘 만났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이들도 있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이 ‘떡상’을 한다거나, 사업을 잘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도 많다. 소위 ‘졸부’라는 사람도 있고, 원래 부자라 대대로 물려받은 사람도 있다. 세계적인 부자인 빌게이츠, 일론 머스크가 있는 반면 일용직 노동을 하며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그렇다고 해서 그 금수저들이 마냥 좋으냐, 그렇지도 않다. 조건이 완벽한 사람들도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극단적인 길로 가기도 한다. 흙수저로 어렵게 태어났다고 해도 소욕지족하며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보통 사람이 훨씬 많다. 우리가 부자면 돈이 많으면 괴로움이 없겠지, 권력이 많아 괴로움이 없겠지, 명예가 높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락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내 앞길을 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의 본질을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다.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나머지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좋다. 그러나 성취해서 즐겁고 행복하게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도 계속 윤회한다. 고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의 총량과 낙의 질량은 0.1g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똑같으나 다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나타나는 시간, 그에 따른 대가로 괴로움이 나타나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1초 안에도 고락이 왔다 갔다 하고, 1시간, 하루 안에 감정이 왔다 갔다 한다. 이걸 삼세로 크게 봐서 전생, 금생, 내생으로 나눠 보면 고락이 출렁인다. 지금 좋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에 따른, 즐겁고 행복한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운 과보가 반드시 생긴다.
현상과 나의 고락이라는 감정은 사실 별개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대승경전의 내용을 보면, <화엄경> <방등경> <법화경> <금강경> <아함경> <아비달마> 등 지금 내가 보고 듣는 현상,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화엄경>도 이법, 사법, 이사무애, 사사무애 등 사법계에서 현상은 연기할 뿐이니 현혹되지 말라고 했다. 고락이라는 내 업은 현상과 따로 돌아간다는 게 모든 경전과 논전에서 나오는 얘기다. 조사들 말씀한 내용도 결국엔 마찬가지이다.
서옹스님도 늘 말씀하신 ‘수처작주 입처개진’도 마찬가지다. 그게 보통은 어느 곳에서든지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라, 잊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왜 주인인가,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물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무엇인가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어느 곳에 가서 고락이라는 윤회가 사라지고, 그것을 업멸, 업장소멸했다고 하는데, 완전히 사라진 중도의 마음 상태가 되면 어디 있든, 저기에 있든, 이때든, 저 때든 무슨 상관있나. 그게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 좋다고 하면 싫다는 과보가 생긴다. 일단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즐거움과 같은 질량의 과보가 생기나 언제 나타날지는 저도 알 수 없다. 과학의 발달로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행복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자.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맛을 보고, 느꼈고, 생각으로 기분좋은 상상을 했다고 했을 때, 행복감이 생겼으니 반드시 저것이 생긴다. 동전의 앞 하면 뒤가 바로 생기듯이, 즐거움을 느꼈다 하면 괴로움이 즉시 생긴다. 언제 어느 때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나타난다.
주식이 올라서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떨어져서 휴지 조각이 됐다고 하자. 주식투자에서 고락이라는 인과가 생겼다. 내가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기분이 좋았다면 그 과보가 생긴다. 늙어서 몸이 말을 잘 안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것은 몇십년 후 인과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고락의 인과관계를 내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고의 원인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저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겨 고락이 반복한다. 이를 윤회라고 한다. 지옥, 천상이 있는지 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가 중요하다.
내가 머리가 좋고, 돈이 많고, 명예와 권력이 있다고 해도 괴로움이 없을 수 없다.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물론 있으면 좋을 것이다. 저 역시 뭐가 생기면 순간적으로 좋다. 그래 봤자 생노병사하고 성주괴공할 뿐이다. 문제는 ‘나’다.
예를 들어 가족을 떠올려보자. 대다수는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산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분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부인이 있고 아들 ‘라훌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출가를 했다. 유교적인 입장에서 그렇지만, 지금도 가족을 버리고 뭘 한다, 나만 살겠다 하면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우리는 천륜이라고 한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더 따져볼 게 있다. 고락이라고 하는 감정, 분별이라고 하는 인과의 업은 오롯이 각자가 가진 것이다. 몸도 따로인데 감정 정신이야 당연히 따로지 않겠나. 다만 집착이 연결고리가 돼 있다. 잠재적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서로 끼리끼리 잡아당기는 힘이 있고 비슷한 것끼리 모여 있다.
불교적으로 보면, 비슷한 고락이라고 하는 감정이 서로 유유상종한다. 그게 부모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다. 정끼리 서로 뭉친다는 말이다. 정이 비슷해 애착이 생기는 것이다. 남녀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각자 비슷한 정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서로 엄청난 힘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고 행복할 것인가. ‘기분이 째지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 아닌가. 그러니 낙업이 얼마나 클까. 즐거운 낙업이 엄청난 크기라면,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 고통이라는 과보가 이미 생겨났다.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잘게 썰어서 나타날지, 한꺼번에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 질량만큼은 반드시 나타난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나. 이 감정이 생기면 저 감정이 당연히 생겨난다.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이 차이가 나듯, 기분 좋은 행복한 게 생기는 때가 있으면 반대의 경우가 생긴다. 그게 전생에 생겨 현생에 나타날 수 있고, 현생에 생겨 내생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고락사라는 감정의 원인을 알아야, 지금 내가 왜 화를 내고 기분이 나쁜지, 왜 내가 기쁜가, 슬픈가를 스스로 알 수 있다.
여러분 지금 기분이 어떤가. 기분이 좋다면, 지금 이 상황으로 기분이 좋기 이전에, 나의 감정과 현상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괴로운 감정이 왜 생기는가, 간단히 말하면 즐거운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감정은 괴로운 감정이 있기에 생긴다. 고락의 순환고리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머리가 좋아도, 그것은 이름뿐이다. 그래 봤자 괴로울 때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럽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권력이 많고 돈이 많아도 허깨비에 불과하다. 저나 여기 있는 스님들은 천재들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출가했기 때문이다.
고락은 서로 상의상존한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질량으로 따지면 즐거움의 질량과 괴로움의 질량은 같다. 다만 고락의 업이 큰 사람의 경우, 즐거움도 크고 괴로움도 큰다. 극단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극상의 기분 좋음을 느끼나, 마약을 하지 못하면 죽을 만큼 괴로워한다고 한다. 그 경우 고락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이다.
점잖다고 하면 고락의 기분을 극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경험에 의해 고락이 크지 않다. 부처님은 ‘0’ 제로이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의 감정이 없어 해탈, 중도이다. 고락이 윤회하는 것을 끊어낸 분이다.
여러분도 이걸 철저하게 이해하고 체득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을 신심이라고 한다. 부처님 법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온몸으로 믿을 때 그게 불심이다. 내가 무작정 부처님을 찾는 게 불심이 아니라, 부처님 법을 철저하게 믿는 것이다.
부처님 법, 고락사라는 인과가 반복 윤회하는데, 이것을 끊어내면 바로 견성, 성불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그게 중도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하면서 이것을 성공시키고, 시험에 합격을 해야 하고 사업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은 껍데기다. 잠시 전생의 복으로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물론 자기가 닦아놓은 업이긴 한데, 현상을 보고 너무 좋아할 것은 아니다. 즐겁고 행복할 순 있으나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 중도심이 되는 게 중요하다.
고락이라는 인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우리가 1년을 놓고 보면,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의 고락, 기분 좋은 감정, 나쁜 감정, 모두가 내가 지어서 생긴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힘들고, 화가 나고 기쁘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현상은 상의상존하고, 서로서로 영향을 주며 생긴 것이다. 우주법계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인드라망이라고 하고 삼라만상이라고 한다. 어떤게 원인이고 결과인지 명확치 않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인 즉 원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꾸 변한다. 생노병사 성주괴공 생주이멸하면서 계속 바뀐다. 무상이니까 무아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착각한다. 너 때문에, 혹은 뭣 때문이라고 한다. 한두 가지 원인으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종자에 따라 열매가 다르듯, 즐겁고 괴로운 감정의 종자를 우리가 갖고 태어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식이라고 한다. 부모라는 고락의 종자와 나라고 하는 고락의 종자가 유사하기 때문에 비슷한 정이 만나서 부모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일이 잘 안되서 내가 괴롭다고 하자. 일은 현상이다. 원인과 결과를 특정할 수 있지만, 과거와 현재, 삼라만상이 연결돼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본 원인 결과와는 다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목적이 이뤄지지 않아 기분 나쁘다면, 현상으로 인해 기분 나쁘다고 믿겠지만, 아뢰야식, 말나식에 갖고 있는 고락이라는 종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나 마음을 깨친 조사 스님들, 보살, 아라한들은 고락의 업 종자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분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어떤 현상에도 끄달리지 않고, 유혹되지 않는다. 눈꼽 만큼 기분 나쁜 게 나타나지 않아서다. 일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 없다는 말이다.
그걸 해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간화선 수행하면서 방하착하고 백척간두 진일보하면 된다. 간단하나 근기 약한 사람들은 어렵다. 그래서 선명상을 하라는 것이다. 선명상을 하는 목적은 여러분의 평안을 위해서다. 괴롭지 않은 기분 나쁘지 않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을 위해, 선명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가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현상은 인연 연기로 생겨난다. 현상도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현상을 비교하면서 보는 법이 있다. 대표적인 게 유무, 있음 없음이다. 상하, 대소, 피차, 원근, 미추 등 서로 비교해서 보는 현상이다. 공간으로 보는 현상도 있다. 동서남북 중앙, 시방이 있다. 시간으로 보는 현상도 있다. ‘법성게’에는 ‘구세십세호상즉’이라고 하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라고 한다. 과거에도 삼세가 또 있다. 현재에도 삼세가 있고, 미래에도 삼세가 있다. 그래서 구세이다. 지금이라는 현전, 찰나간을 합쳐 10세이다. 주관적으로 보는 게 있다. 옳고 그름, 바름 삿됨, 호불호, 긍정부정, 선악 등 주관적으로 보는 현상도 있다. 자기 중심적인 것은 고락의 업과 즉결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지진은 시간과 공간 여러 현상이 중첩돼 일어난다. 엄청난 원인들이 모여 태풍, 해일이 일어나는데, 여러 현상이 영향을 준다. 이를 연결적 현상이라고 한다. 다음 주에는 현상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주겠다.
덧붙여 선명상은 하루에 5분 이상 해야 한다. 하루에 최소 5분 ‘무시로 명상’ 실천해라. 일단 숨을 고르게 하자. 마음이 복잡하면 숨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숨을 고르게 하는지 살피자. 움직임을 최소화해라. 숨을 고르게 한다는 것은 심장 박동을 최소화한다는 말이다. 장수하는 동물을 보면 심장 뛰는 것을 최소화한다. 그래서 움직임이 느리다. 천천히 하는 게 중요하다. 눈은 감거나 한 곳을 응시하는 것도 좋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앉아서 좌선하는 게 가장 좋긴 한데, 서서 해도 얼마든지 좋다. 서면 똑바로 서고, 앉으면 똑바로 앉고, 누우면 똑바로 누워야 한다. 염불, 독경해도 좋다. 그런 걸 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하루 중 일어났을 때, 혹은 자기 전에 규칙적으로 하면 좋다. 처음엔 5분이지만, 점차 늘려 50분 정도 명상하면 좋다. 선방에서도 대개 50분 정진하는데 그 정도로 시간을 늘려가자. 내가 어디 있고, 어떤 행동을 하든, 감정을 분리시키되, 분리되지 않은 감정을 나의 거울이다 하면 좋다. 감정을 최소화하자.
(사진, 내용 정리: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