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子年 冬安居 宗正猊下 結制法語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堂堂坐斷千差路(당당좌단천차로)
倒騎鐵馬入重城(도기철마입중성)
蓮花朶朶火中開(연화타타화중개)
靑山步步水上行(청산보보수상행)
당당히 앉아서 천차로(千差路)를 끊고
철마를 거꾸로 타고 중성(重城)을 들어감이라.
연꽃은 송이송이 불 가운데 핌이요
청산은 걸음걸음 물 위를 행함이로다.
금일(今日)은 경자년 동안거(冬安居) 결제일(結制日)이라.
우리가 세간(世間)의 온갖 풍요(豊饒)와 편리(便利)를 마다하고 자발적(自發的)으로 산문(山門)을 폐쇄(閉鎖)하고 세상과 단절(斷切)하고 정진(精進)하는 것은 오로지 나고 죽는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영구(永久)히 벗어나는 데 있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로다.
이 일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증득(證得)해야 함이로다.
결제(結制)에 임하는 대중(大衆)은 이번 석 달 동안은 모든 반연(攀緣)을
다 끊고, 삼시 세끼 먹는데 초연하고 옆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화두를
성성(惺惺)하게 챙겨서 팔만사천 모공(毛孔)에 의심이 사무치게 해야 함이라.
그렇게 혼신(渾身)의 노력을 하다 보면 문득 참의심이 발동하여 화두의심 한 생각만이 또렷이 드러나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끊어짐 없이 흘러가게 됨이라.
이때는 사물을 보아도 본 줄을 모르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줄을 모르게 되어 다겁다생(多劫多生)에 지어온 모든 습기(習氣)가 다 녹아 없어져 버리게 됨이로다.
이러한 상태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자기의 참모습이 환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로다.
그러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여래(如來)의 땅에 이르게 되고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버리게 됨이라.
이러한 화두일념삼매(話頭一念三昧)의 경계가 오지 않고는 견성(見性)이 불가능하니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라.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하고
이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기를 하루에도 천 번 만 번 반복해서, 화두 의심
한 생각이 끊어짐이 없도록 참구(參究)하고 또 참구해야 함이로다.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위대한 마조 선사(馬祖禪師)의 회상(會上)에서 전국의 발심한 납자(衲子)들이 밤낮으로 용맹정진하여 84인의 도인(道人)제자를 배출하였음이라.
그 중에서 향상일구(向上一句)를 투과하여 확철대오(廓撤大悟)한 전법제자(傳法弟子)는 백장(百丈)선사와 남전(南泉)선사, 서당(西堂)선사 등 오륙인(五六人)에 불과함이라.
석일(昔日)에 마조(馬祖)선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계시던 차제(此際)에
백장 스님이 들어오니, 선사께서 법상 모서리에 걸어 놓은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셨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여쭙기를,
이를 바로 씁니까, 이를 여의고 씁니까?
하니, 마조 선사께서 그 불자를 원래 걸려 있던 자리에다 도로 걸어 두셨다.
한동안 백장스님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니, 마조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장차 양 입술을 열어 대중을 위해서 어떻게 가려는고?
그러자 이번에는 백장스님이 걸려 있던 불자를 들어 보이니,
마조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다.
이를 바로 씀인가, 이를 여의고 씀인가?
백장스님이 아무 말 없이 불자를 도로 제자리에 걸자,
마조 선사께서 “억!하고 벽력같은 ‘일할(一喝)’을 하셨다.
이 ‘할(喝)’에 백장스님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가 깨어나서 마조 선사께서 ‘할’하신 뜻을 깨달았다.
백장 선사는 여기에서 마조 선사의 법(法)을 받아서, 분가(分家)하여 다른 곳에 주(住)하며 법을 펴셨다.
몇 년 세월이 흐른 후에, 황벽(黃檗) 스님이 백장 선사를 방문하여 친견하고 며칠 머물다가 하직인사를 하였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서(江西)에 마조 선사를 친견하러 가고자 합니다.
마조 선사께서는 이미 천화(遷化)하셨네.
저는 인연이 없어서 그 위대한 마조 선사를 한 번도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래도록 마조선사를 모시고 지도 받으셨으니, 저에게 마조 선사의 고준한 법문을 한 마디 설해 주십시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는 마조 선사를 참예(參詣)하였을 때, 불자(拂子)를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내가 그 때 마조 선사께서할(喝)’하신 소리에 사흘 동안 귀가 먹었었네.
황벽스님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결에 혀를 쑥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조 선사의 ‘일할(一喝)’에 두 분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벽 선사는 백장 선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어 법을 이으셨다.
그러면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이 얼마나 위대하길래, 두 분 선사께서 그 아래에서 몰록 깨치셨을까?
이 ‘일할’가운데는 비춤[照]도 있고, 씀[用]도 있고, 줌[與]도 있고, 뺏음[奪]도 있고, 죽임[殺]도 있고, 삶[活]도 있다.
마조 선사의 이 ‘일할’을 좇아서 백장 선사로, 황벽 선사로, 임제 선사로 이어져서 중국 선종오가(禪宗五家)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이 탄생하게 되었음이라.
일러라!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의 낙처(落處)가 어디에 있느냐?
蒼天後更添怨苦(창천후갱첨원고)
곡(哭)을 한 후에 다시 원한의 괴로움을 더함이로다.
또한 선종오가(禪宗五家)의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의 개창조(開創祖)인 운문(雲門) 선사께서 세연(世緣)이 다해가니, 대중(大衆)에게 세 가지 법문(法門)을 내리셨다.
첫번째, 어떤 것이 진리의 도(道)인가?
두번째, 어떤 것이 제바종(提婆宗)인가?
가나제바(迦那提婆) 존자는 부처님 심인법(心印法) 제14조 법손(法孫)인
용수보살의 제자로서 당시 인도의 96종의 외도(外道)를 조복(調伏) 받아 제바종의 종지(宗旨)를 크게 드날렸다.
세번째, 어떤 것이 진리의 보검인가?
이 세 법문을 대중(大衆)에게 제시하니, 파릉(巴陵)스님이 멋진 답을 하심이라.
첫번째, 어떤 것이 진리의 도(道)인가?
“눈 밝은 이가 깊은 우물에 떨어졌습니다.”
두번째, 어떤 것이 제바종인가?
“은쟁반에 흰눈이 소복했습니다.”
세번째, 어떤 것이 진리(眞理)의 보검인가?
“산호나무 가지가지에 달이 주렁주렁달렸습니다.”
운문 선사께서 파릉스님의 답에 크게 칭찬하시면서,
“내가 열반에 든 후, 기일(忌日)에 갖가지 음식을 차리지 말고 항상 이 세 마디 법문을 들려다오.” 라고 하셨다.
이 세 마디 법문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9년간 설(說)하신 팔만대장경을 뛰어넘는 것이다.
마조 선사의 일할(一喝)과 운문 선사의 삼전어(三傳語)를 알아야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아는 것이고, 진리(眞理)를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전하는 저력(底力)을 갖추어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고,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에서 진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이라.
이 법문(法門)을 알아오는 이가 있으면 산승(山僧)이 이 주장자를 두 손으로 전해줄 것이라.
노력하고 또 노력할지어다.
대중은 운문 일가(一家)를 알겠는가?
[양구(良久)하신 후 이르시기를]
盲人相逢堪笑處(맹인상봉감소처)
扶籬摸壁可憐生(부리모벽가련생)
눈 먼 사람들이 서로 만나 웃는 곳에
울타리를 붙잡고 담장이라 하니 가히 불쌍하구나.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고 하좌(下座)하시다.〕
佛紀 2564年 11月 29日
大韓佛敎曹溪宗 宗正 眞際 法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