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제 30회 특별전
‘가슴에 새긴 불심’
- 파평윤씨 재령공파 어모장군 윤좌형과 부인 고부이씨의 묘 출토복식 展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민속복식 분야에서는 11월 11일부터 11월 27일까지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가슴에 새긴 불심’이라는 주제로 열리는데, 파평윤씨(坡平尹氏)재령공파(載寧公派)어모장군(御侮將軍:정3품 당하관) 윤좌형(尹佐衡: 17세기 초 추정)과 부인 고부이씨(古阜李氏: 17세기 초 추정)에서 출토된 39점의 유물이 전시된다. 2004년 3월 4일에전북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파평윤씨 문중 선산을 국토개발로 인해 이장하는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어모장군의 유물은 3점이며 부인 고부유씨의 유물이 36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부인 고부이씨는미라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수의로 입고 있던 한삼과 저고리 사이에서 다라니[咤羅尼] 4장이 발견되었다. 고부이씨 품안에 간직한 다라니는 억불 숭유 정책의 조선에서 불교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었던 주요 종교였음이 확인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미라 발견 상황은 당시에 전주 kbs 9시 뉴스에도 보도된바 있다.
문중에 의하면 윤좌형 장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에 활동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부인은 명정에서 9품 벼슬의 부인에게 칭하는 “孺人…”의 묵서가 발견되어 남편이 어모장군이 되기 이전에 돌아가신 것을 알 수 있다.두 분 모두 생몰년도가 불확실하지만 문중 증언과 부인의 복식 유물 조형성 분석였을 때 17세기 초반의 인물로 추정된다.
부인 고부이씨(17세기 초반)의 유물
부인의 묘에서 36점이 각각 출토되었다. 부인은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부인 고부이씨는 명정에서 9품 벼슬의 부인에게 칭하는 “孺人…”의 묵서가 발견되어 남편이 어모장군이 되기 이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종류별로 보면, 한삼, 적삼, 저고리류 속바지, 접음단 치마, 장옷, 짚신, 버선 등의 복식류 19점과 명정, 현?훈, 소렴이불 등 염습 제구 17점 등이며 대부분 면과 삼베로 만들어 소박한 편이다.
특히 부인은 수의로 웃옷 5점, 아래옷 5점을 입고 있었는데, 입고 있던 한삼 안에서 3장, 저고리 안에서 1장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묘주가 생전에 불심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억불 숭유 정책의 조선에서 불교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었던 주요 종교였음이 확인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어모장군(17세기 초반)의 유물
어모장군은 출토 당시 육탈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유물도 심하게 훼손되어 극히 소량만 수습이 가능하였다. 수습된 유물은 ‘어모장군윤공지구 御侮將軍尹公之柩’로 묵서된 명정, 곱게 짜내려간 미투리 1쌍, 대나무 틀만 남아있는 삽 등 모두 3점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17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소박한 복식 문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이 면으로 만든 옷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헤진 곳을 덧대어 입은 것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여성의 옷이 대분을 차지하며 목판깃형 저고리가 실루엣이 급격한 곡선을 보여주며 접음단 치마가 나오는 등 17세기 초반의 의생활 양식을 띈다. 또한 고부이씨 품안에 간직한 다라니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었던 주요 종교였음이 확인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부이씨 묘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
(1) 억불 숭유 정책 속에서 꽃피운 불교 신앙
옷 품에 넣어준 다라니[陀羅尼}는 묘주가 생전에 불심(佛心) 깊었던 인물이었으며, 다라니 봉안을 통해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후손들에 의하여 납입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출토 다라니의 판식은 목판본에 오른쪽 상부의 간행처를 필수로 하여, 한쪽 면에는 글자를 새기고, 다른 한쪽 면에는 도안과 문양을 새겼다. 간행처는 ‘金堤地僧加山興福寺開板’이라고 새겨 넣었는데, 부안에서 북쪽으로 있는 김제 땅의 승가산 자락에 있었던 흥복사(정유재란에 폐허가 되어 1625년에 중창됨)에서 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다라니는 범어-한글-한자어로 구성되었으며 내용은 성불, 자녀출산, 부부 장수 등을 기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라니는 불상 복장물로 많이 봉안하는데 다라니가 특히 장수하는데 효험이 크다고 한다. 고부이씨묘 출토 다라니는 불복장물이 아닌 무덤에서 출토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무덤에서 다라니가 발견된다는 것은 억불 숭유 정책의 조선에서 불교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었던 주요 종교였음이 확인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2) 고부이씨의 염습 과정에서 확인되는 17세기 상장례 풍습
① 생전의 옷을 사용한 수의(壽衣)는 상의(上衣) 5점과 하의(下衣) 5점을 입었다.
고부이씨는 수의로 총 10점의 옷이 사용되었으며 이외에 멱목, 여모, 버선이 수습되었다. 특이한 것은 하의는 직접 입고 있었으나 상의는 소매 5점이 함께 끼워진 상태로 묘주의 상부를 감싸주었다. 상의는 홑 한삼(No.10299) - 홑 적삼(No.10300) - 솜 저고리(No.10301)- 솜 장옷(No.10302) - 솜장옷(No.10303)의 순이다. 아래옷으로는 밑이 막힌 바지[合?袴](No.10304~6) 3점을 순서대로 입은 후 위에 밑이 트인 바지[開?袴](No.10307)와 접음단 치마(No.10308) 순으로 덧입었다. 지나치게 성글게 바느질된 한삼을 제외하고는 평상시 입었던 옷의 흔적 들을 볼 수 있는데, 수의 저고리, 장옷 등은 안감을 여러조각을 이어 만들었으며 바지는 삼각바대를 쪽이음하는 만들었다.
② 옷고름과 깃 동정을 임의로 잘라냈으며, 염포 끈은 묶지 않았다.
고부이씨의 복식 유물은 대부분 고름이 부착 부분 끝에 아주 조금만 남아있어 완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잘린 형태로 보아 묘주에게 염을 하면서 고름을 강제적으로 잘라낸 것으로 확인된다. 칼깃형 저고리 1점을 제외한 넣어준 모든 복식 유물 즉, 장옷, 저고리, 한삼, 적삼, 바지. 치마 등의 고름 끈이 없는 상태이며 특히 저고리와 장옷은 깃 동정도 탈락되어 없는 상태이다. 또한 소렴포와 대렴포의 끈은 묶지 않고 단단히 꼬아 고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염습의의 끈을 잘라내거나 묶지 않는 사례는 조선시대 전시기 출토복식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이는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하여 옷고름을 묶을 필요가 없어서 묶지 않는다는 옛 조상들이 예(禮)를 옷고름을 잘라내는 것으로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③ 수례지의(?禮之衣)로 넣어준 칼깃형 저고리와 다라니
우리 조상들은 수의를 제외한 소렴, 대렴, 보공 등에 배우자나 지인들이 죽은자를 기리면서 보내온 물건을 관 속에 넣어 주는 수례(?禮) 관습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묘주와 성별이 다르거나 크기가 다른 옷들이 넣어지기도 한다. 고부이씨에게도 수례지의로 여러 점을 넣어주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옷은 1점이다. 대렴으로 넣어준 칼깃 저고리(No.10316)가 이에 해당한다. 칼깃형은 전형적인 남성용 저고리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따라서 여성인 묘주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습의에 사용된 옷들이 모두 고름이 잘리거나 동정이 없는 것에 상태임에도 유일하게 칼깃형 저고리에만 고름과 동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지인이 옷을 넣어준 것임을 더욱 짐작케 한다.
이외에도 수의 한삼과 저고리 안자락에 봉안한 4장의 다라니도 수례지의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생전에 불심의 강했던 묘주를 위하여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후손들이 넣어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