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庵 大宗師 영결식 및 다비식 봉행
西庵 大宗師 영결식 및 다비식 봉행
종단 특별종립선원인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위상과 기틀을 마련하셨던 서암대종사(西庵 大宗師)께서 전국에서 모여든 스님과 신도 6천여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반에 드셨습니다.
4월 2일 초하루 오전 10시 30분, 출가자의 사표로 존경받던 서암 대종사님의 永訣式 및 茶毘式이 엄숙하게 봉행되었습니다.
영결식은 5번의 명종을 시작으로 삼귀의, 반야심경, 영결법요, 행장소개(고우스님-각화사 선원장), 추도입정(육성법문), 법어(종정예하), 영결사(지유스님), 원로회의의장 도원스님ㆍ총무원장 법장스님ㆍ종회의장 지하스님ㆍ수좌대표 정광스님ㆍ이창동 문광부장관(오지철 차관대독)ㆍ이의근경북도지사의 조사낭독, 조시(弔詩) 및 조가(弔哥), 헌화 및 분향, 문도대표 서호스님의 인사말씀, 사홍서원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종정예하인 법전스님이 직접 참석하였으며, 영결법어를 통해 “서암스님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갔듯이 임제선풍을 이어온 이 시대의 선지식”이라고 회고하며, “돈오문중에 한 몸을 던지셨으니 돌솥에 차를 달여 종사께 올립니다”며 서암스님의 수행자로서의 삶의 뜻을 기렸습니다.
총무원장 법장스님도 참석, 조사를 통해 “스님이 이룩한 이 청정한 도량, 봉암사에 다시 오셔서 불이의 법문을 여시고 많은 납자들이 그 뜻을 여실히 깨치도록 지혜당을 세워주시길 바란다”고 스님을 기렸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조문메세지와 이창동 문광부장관의 조사를 오지철 문광부차관이 대독하였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조문메세지를 보내와 “서암대종사의 입적을 마음으로부터 애도드리며, 지난 세월동안 삶으로 보여주신 법덕이 사부대중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귀한 가르침들을 국민과 함께 기리겠다”고 간곡한 조문 표시를 하였습니다.
영결식후 만장이 앞장선 가운데 일주문 앞에 마련된 연화대로 이운이 되었으며, 수많은 대중들의 염불소리가 장엄하게 울리는 가운데 원로스님들과 수좌대표들이 거화를 하였습니다.
한평생 무소유와 검소한 삶을 실천함으로써 수행자들의 사표가 되셨고, 사부대중의 스승역할을 하셨던 서암큰스님의 육신은 대중들이 장엄한 염불소리와 함께 우주법계로 화현하셨습니다. 장의위원회는 서암대종사님의 유훈에 따라 사리수습은 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종정예하 영결법어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이 땅에 떨어졌으니
불일서경佛日西傾하니 조인타지祖印墮地로다
내류화적來留化跡하니 하처우봉何處又逢하리오
불일이 서쪽으로 기우니 조사의 심인이 땅에 떨어졌구나.
와서 교화의 흔적 남겨두셨으니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오.
새삼 고인들의 임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당나라 때 보화 스님의 열반모습은 그대로가 법문입니다. 보화 스님이 거리에 나가 사람들더러 장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매번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 스님은 그 때마다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께서는 원주를 시켜서 관을 하나 사오게 하고는 보화 스님이 돌아오자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대를 위하여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 스님은 곧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시내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가보니 보화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사흘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자 혼자 북문으로 나가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 가는 행인더러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습니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어보니 몸은 빠져 나가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소리만 은은히 울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흔적없이 가고자 한 것이 조사의 가풍인 것입니다. 서암 대종사 역시 이러한 임제선풍을 이어온 이 시대의 선지식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기실 말씀을 묻는 시자에게 “그 노장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돈오문중일척신頓悟門中一擲身하니 석정증다헌종사石鼎蒸茶獻宗師로다
돈오문중에 한 몸을 던지셨으니 돌솥에 차를 달여 종사께 올립니다.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종정 도림법전 분향
총무원장 조사
화두가 없으면 산 송장이라 하셨으니
스님은
유여만월현고희양산猶如滿月顯高曦陽山이시니
혜광변조시방慧光邊照十方하여 도무량중생度無量衆生하십니다.
가희 희양산에 높이 뜬 둥근달 같으시니
지혜광명이 시방 끝에 두루 비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십니다.
이제 스님은 상주어적정常住於寂靜에 드셨으니 상음법감로常飮法甘露하시고 안주보련화安住寶蓮華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스님!
여래자如來者는 무소종래無所從來하고 역무소거亦無所去한다 하셨으니 유심자비有深慈悲하신 스님께서는 어서 오셔서 격무상법고擊無上法鼓하여(무상의 법고를 울려) 종도와 종단은 물론 이일체세간利一切世間하시옵소서(일체세간을 이익되게 하소서).
오늘 소납이 영결식장에 서니 스님이 남기신 말씀과 삶의 모든 것들이 수행의 지침과 교훈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다시 살아납니다.
“중은 화두가 생명이니 화두가 없으면 산 송장이다.”라고 하시었으며, “이불 깔고 자려고 생각하면 공부하는 수좌가 아니다.”라고 하시어 방일放逸을 경계하고 근수정행勤修精行을 독려하셨습니다. 한때는 잘 먹고 잘 입으려고 중된 것이 아니니 고무신 꿰매어 신듯 순수하고 검박하게 사는 것이 중노릇임을 강조하셨으며, 스님 또한 항상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많이 아는 것은 귀貴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아는 것을 다 털어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시며 지적 오만과 편견의 함정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을 통한 대중화합을 강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30세 젊은 나이에 계룡산 나한굴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한순간 환희와 탄성으로 마무리하고 게송偈頌을 지어 상相을 내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열반의 말씀마저 거두시는 것으로 안주평등상安住平等相한 가운데 말없는 말로써 광발대비심廣發大悲心하셨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안주평등상安住平等相한 가운데 사시는 스님께 대중은 무리하게 간청을 드려 ‘종정’에 추대드리니, 자타自他가 일여一如하므로 종단의 일이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는 평소의 신념으로 거부 의사를 철회하시고 종단의 화합과 개혁을 실천하려 하셨던 깊은 뜻을 우매하여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유유제불唯有諸佛은 능증지能證知하셨고, 지금 대중은 그때를 깊이 성찰하고 있습니다.
스님!
광발대비심廣發大悲心하시어 스님이 이룩한 이 청정한 도량, 봉암사에 다시 오셔서 무량자재無量自在함으로 항상 불이不二의 법문法門을 여시고 많은 납자들이 관찰진실의觀察眞實義하도록 건립지혜당建立智慧幢하소서.
삼가 큰스님의 각령전에 분향하여 정례드립니다.
불기 2547(2003)년 4월 2일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분향
대통령 조문 메세지
- 2003.4.2 / 문경 봉암사 -
서암 대종사의 입적을 마음으로부터 애도 드립니다. 지난 세월동안 삶으로 보여주신 법덕은 사부대중들의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귀한 가르침들을 국민과 함께 기리며, 다시 한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2003. 4. 2
대 통 령 노 무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