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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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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등록일 조회
408
선일행 송정숙씨, 신계사 복원불사에 2억 5천만원 쾌척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강씨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78세의 선일행 송정숙씨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보태라며 2억 5천만원의 약정을 하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송정숙씨는 지난 12월 20일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렇게 불사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줘 고맙습니다"라며 2억 5천만원의 약정서를 전달하였으며,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자기를 버릴줄 아는 진정한 보살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인행 송정숙씨는 지난 1946년 5남매 중 홀연히 서울로 왔다가 남북전쟁 등으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슬하에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으나 큰 아들이 지난 10여년 전 사망을 하였고, 그 이후 당시 남양주 봉선사에 계시던 운경스님이 송정숙씨에게 산신각 불사를 권유하였습니다. 이에 선인행 송정숙씨는 지난 11월 우연히 금강산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 모집 광고를 보고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신계사에 발을 딛는 순간 '여기가 바로 내가 불사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신계사에 회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인행 송정숙씨는 제일 좋아하는 경전으로 "반야심경"을 손꼽았습니다. 또한 좋은 기도처를 찾아 다니며 여러 경전을 외우는 것보다 가까운 절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습니다.
2004-12-21 1,577
407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교역직 종무원 인사 이동
2004. 12. 16일 아래와 같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교역직 종무원 인사가 시행되었습니다. - 아 래 - 부서 직책 법명 발령사유 임명일 사회부 사회국장 환적 의원면직 2004.12.16 호법부 호법국장 자공 의원면직 2004.12.16 호법부 조사과장 서호 의원면직 2004.12.16 기획실 감사국장 태진 신규임명 2004.12.16 사회부 사회국장 인오 신규임명 2004.12.16 호법부 호법국장 삼혜 신규임명 2004.12.16 사서실 사서국장 효웅 전보 2004.12.16 호법부 조사과장 법원 신규임명 2005.1. 3 호법부 상임감찰 정암 신규임명 2004.12.16 호법부 상임감찰 심학 신규임명 2005.1.3 호법부 상임감찰 대법 의원면직 2004.12.16 호법부 상임감찰 신해 의원면직 2004.12.16
2004-12-17 2,342
406
직지사 신임주지 성웅스님 임명장 수여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은 12월 14일 오전 10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집무실에서 8교구 본사인 직지사 신임 주지 성웅 스님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을 가졌습니다. 직지사 주지 성웅스님은 지난 10일 오후 1시 직지사 산중총회를 통해 신임 주지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집안의 어른스님을 잘 모시면 모두 편할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도 주지스님을 잘 모실 것”이라며, 원융화합을 통한 사찰운영을 당부하였으며, 이에 성웅스님은 ""큰 스님들을 잘 모시고 아랫사람들의 뜻을 잘 살펴 원만한 살림살이를 해 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웅 스님은 임명장 수여식이 끝난 후 가진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직지사는 한국불교 1600여 년 동안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찰이었다”며 “단기간 내에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수행과 교육, 포교, 복지 등의 분야에서 사중의 공의를 통해 본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성웅 스님은 1970년 일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71년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지난 75년부터 상주 남장사 주지를 맡고 있었습니다. 또한 상주 냉림종합사회복지관장을 겸하고 있는 성웅 스님은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시설장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사회복지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 수계 1970년 2월 해인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71년 5월 해인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 학력 1973년 해인사 사교과 수료 1993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선학과 수료 * 경력 1994년 개혁회의 의원 엮임 2001년 ~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초심호계위원 2001년 ~ 현재 행자교육원 갈마위원 1992년 ~ 현재 남장사 주지 * 표창 1985년, 1998년 총무원장 표창 2000년 교정대상 본상 2000년 사회복지사업우수단체상
2004-12-14 2,156
405
총무원 문화국장에 혜조스님 임명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국장에 혜조(慧照, 박계희)스님이 임명되었습니다.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13일(월) 오전 10시 30분, 총무원장 집무실에서 신임 문화국장 혜조스님에 대한 임명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혜조스님은 1987년 9월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으며, 1991년 10월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습니다. 혜조스님은 1991년 10월 범어사에서 계덕법계품수를 받았으며, 1992년 봉녕사 승가대학교 대교과를 졸업하였습니다.
2004-12-13 1,720
404
중앙종무기관 일반직 종무원 정기 인사
공 지 12월 9일(목) 16시 실시된 인사위원회 회의결과를 다음과 같이 공지합니다. 1. 종무원 파견의 건 대상자 파 견 처 파 견 기 간 이 석 심 해인사 종무소 2004년 12월 1일 - 2005년 11월 30일 윤 영 희 문화사업단 2005년 1월 1일 - 2005년 12월 31일 심 원 섭 문화사업단 2004년 11월 1일 - 2005년 10월 31일 2. 2004년도 일반직 종무원 정기 인사의 건 인사 이동 대상자는 12월 17일까지 인수인계를 완료하고 12월 20일(월) 09:00에 각 원별로 임명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다. - 다 음 - 변동 후 직책 성명 변동여부(현 부서) 비고 총무부 총무계장 공승관 전보(재무부) 3급 승급 총무부 민원계장 정미자 직무변경 총무부 행사기획단 과장 박상희 과장직책 부여 기획실 기획과장 황찬익 전보(사서실) 2급 승급 기획실 기획주임 김용구 전보(사회부) 기획실 사원 박숙현 전보(사서실) 기획실 전산계장 권상혁 전보(포교부) 재무부 재정과장 박종현 전보(호법부) 재무부 재정관리계장 장영욱 전보(호법부) 재무부 주임 정경원 감사국 감사주임 겸직 재무부 사원 이영선 전보(호법부) 재무부 재정관리주임 신학녀 전보(기획실) 문화부 문화과장 박종학 전보(중앙종회) 문화부 문화진흥주임 김영환 전보(교육부) 사회부 사회과장(직) 김영주 전보(재무부) 사회부 사회주임 김한일 전보(포교부) 4급 승급 사서실 사서계장 고기복 전보(문화사업단) 재계약 체결 사서실 사원 박민정 전보(포교부) 호법부 사무과장 황철기 전보(기획실) 호법부 조사주임 임해조 전보(문화부) 호법부 사원 이선화 전보(포교부) 교육부 연수계장 류창무 전보(중앙종회) 교육부 연수국 사원 김관규 전보(호법부) 교육원 불학연구차장 박희승 전보(포교연구실) 포교원 포교과장 김병주 전보(신도과장) 포교원 국제포교계장 이민우 전보(기획실) 포교원 포교계장 황충기 전보(총무부) 포교부 사원 박상지 전보(기획실) 포교원 신도과장 이상규 전보(사회부) 포교원 신도계장 인성호 전보(재무부) 포교원 신도주임 김은혜 전보(재무부) 포교원 포교연구과장 고명석 전보(불학연구소) 중앙종회 사무과장(직) 박용규 전보(포교부) 중앙종회 사무주임 김정호 전보(기획실) 사회복지재단 부장 이석심 파견 해인사 템플스테이 팀장 윤영희 파견 문화사업단 문화사업단 심원섭 파견(기획실) 문화사업단
2004-12-10 2,178
403
제12회 보리방송문화상 시상식 열려..
제12회 보리방송문화상 시상식이 12월 8일 오후 2시, 서울 코엑스에서 2천 여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시상식은 재일 보리방송모니터회 회장의 경과보고, 보리방송문화상 운영위원장 수불스님의 인사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치사와 공로패 전달, 박준영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의 축사에 이어 총무원장상을 비롯하여 일반TV 및 불교방송, 불교TV부문 시상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리방송문화상 운영위원장 수불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제12회 보리방송문화상에 조계종 총무원이 보리방송모니터회오 함께 주관으로 참여해 주셨으며, 특히 총무원장 법장스님께서 직접 수여하시는 총무원장상이 신설되어, 이 상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시고 올해를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한국불교의 발전과 이를 위한 대중포교의 한 획을 그어 주신 점에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치사를 통해 ""보리방송문화상을 제정하고 수여하게 된 것은 방송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넘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민족문화를 널리 선양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에 상을 받게 된 분들고 민족문화 선양과 정체성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신 분들고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사단법인 불국토 이사장인 정관스님에게 그동안 보리방송문화상을 운영을 위해 노력해 오신 데 대하여 공로패를 시상하였습니다. 한편 제12회 보리방송문화상 총무원장상에는 방송작가로 불교의 홍포를 위해 노력하신 윤청광님이 수상하였으며, 일반TV부문 최우수 상에는 KBS-1TV 유동종 PD가 연출한 가 수상하였으며, 우수상에는 MBC TV 박승규, 홍예원 연출 , KBS-1TV 선희돈 연출의 가 각각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불교TV부문 공로상에는 불교TV 기술부 카메라팀 김영보 차장이, 불교방송 부문 공로상에는 이명학 불교방송 아나운서가, 포교제작상에는 을 연출한 김상준님이, 보도교양상에는 를 연출한 조문배, 박경수, 신두식, 김용민, 양창욱님이 지역방송상에는 을 연출한 춘천불교방송 김충현님이 각각 수상하였습니다. 불교방송 부문으로는 공로상-이명학(불교방송), 포교제작상-김상준(불교방송), 보도교양상-조문배(불교방송), 지역방송상-김충현(춘천불교방송) 씨가 각각 수상했다. 불교TV부문의 공로상은 김영보 불교TV 카메라팀 차장에게 돌아갔다.
2004-12-09 1,663
402
숭산당 행원대종사 영결식 및 다비식 봉행
겨울비 답지 않게 하루종일 내린 빗속에서 지난 4일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영결식 및 다비식이 1만 5천여 사부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봉행되었습니다. 지난달 11월 30일 주석하고 계시던 화계사에서 입적한 화계사 조실 숭산(崇山)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은 그동안 숭산스님의 해외포교 원력을 새삼 실감하게 하듯“What is this pink?” “What am I?” 등 영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적은 색색의 만장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영결식은 명종을 시작으로 헌다, 헌향, 설정스님의 행장소개,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육성법문,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종산스님의 영결사, 법전 종정예하의 법어,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추도사, 중앙종회의장 법등스님의 종사를 비롯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조사 등의 순서로 거행되었습니다. 조계종 법전 종정예하는 법어를 통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이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스님의 법신(法身)이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스님의 본래 면목입니다”라고 추모하였습니다. 총무원장 법장스님은 추도사를 통해 "부디 적멸의 세계에 들었으나 중생을 어여삐 여기사 여여한 모습을 시현하사 광도중생 하옵소서"라며 큰스님의 원적을 애도하였습니다. 한편 박정규 민정수석이 대독한 메시지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말씀은 인류의 화합과 세계평화를 이뤄가는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며 숭산스님의 높은 공덕을 기렸습니다. 영결식 후, 숭산스님의 법구는 인로왕번, 명정, 삼신불번, 십이불번 등 형형색색의 만장을 앞세우고 스님의 위패와 영정, 법구의 순으로 연화대로 이운되었으며,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부대중의 발원속에 육신의 인연을 풀었습니다.
2004-12-06 1,843
401
前 미국 대선 후보 존 케리, 추모전문 보내와...
지난 11월 30일 화계사에서 원적에 드신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하는 조문 행렬이 계속되는 가운데, 2004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이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하는 전문을 12월 1일 숭산당 행원대종사 원로회의장 장의위원회로 보내왔습니다. 존 케리 상원의원은 전문을 통해 "숭산 행원대선사님의 뜻을 함께 해 온 모든 분들께 애도와 기원을 전한다"며, "100개국 이상에 선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이들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평정을 심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 존(John)도 숭산스님의 영향을 받은 수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존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고, 가족 모두는 그의 삶의 질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준 대선사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린다"며, "존은 가족에게 아낌없고 헌신적인 사랑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와 일을 하면서도 숭산 대선사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존 케리 의원은 "대선사님의 스승님이신 고봉 선사님께서 대선사님께 법을 전하며 '우리는 50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셨듯,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이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저의 애도를 표한다고"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존 케리 의원이 보내온 전문입니다. December 1, 2004 Dear Friends, My condolences and prayers are with all of you who are celebrating the life and work of Zen Master Seung Sahn Soen-sa. Whether working for political and cultural freedom as a young man or, later in life, establishing the Cambridge Zen Center and Zen centers in more than 100 countries, Zen Master Seung Sahn has touched the lives, hearts, and minds of those around him, and untold numbers of people who sought peace and tranquility. One of the people he influenced is particularly close to my heart a cherished member of my family, our son John. Our family will always be grateful for the difference and the healing Zen Master Seung Sahn made and continues to make in John's life every day. Teresa and I can see the impact of Soen-sa nim and his teachings on John's work with young people, and in the love he gives so freely and selflessly to his daughter and his family. Teresa and I wish you all peace in this time of mourning. We know you will continue to be inspired by Soen-sa nim's legacy, and comforted by his teacher, Ko Bong Soen-sa nim's words to him after giving Seung Sahn Kun Sunim the Transmission of Dharma "We will meet again in five hundred years." 친애하는 여러분, 숭산 행원 대선사님과 뜻을 함께해 온 모든 분들께 애도와 기원을 전합니다. 젊은 시절 숭산 행원 대선사님께서는 전 세계에 정치적·문화적 혁신을 일으켰고, 이후 미국의 케임브리지 선원을 비롯, 100개국 이상에 선원을 설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대선사님께서는 수많은 이들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평정을 심어주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제 아들 존(John)도 대선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존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고, 저희 가족 모두는 그의 삶의 질을 끊임없이 향상시켜 준 대선사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존은 자신의 가족에게 아낌없고 헌신적인 사랑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와 일을 하면서도 숭산 대선사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존의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와 제 아내 테레사(Teresa)는 숭산 대선사님께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숭산 대선사님께서 떠나신 이 어려운 시기에도 여러분들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시길 기원합니다. 비록 대선사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무수히 많은 분들이 대선사님께서 남기신 가르침과 정신적 유산을 통해 고무 받아 더 나은 삶을 꾸려 나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선사님의 스승님이신 고봉 선사님께서 대선사님께 법을 전하며 “우리는 50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셨 듯,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이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저의 애도를 표합니다. 마음을 모아,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상원의원 존 케리
2004-12-02 1,903
400
숭산당 행원대종사 원적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이자 1962년 비상종회의장과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 등을 엮임하셨던 숭산당 행원 대종사께서 11월 30일 오후 5시 15분, 주석하고 계시던 화계사에서 원적에 드셨습니다. 숭산당 행원대종사는 원적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다 걱정하지 마라! 萬古光明이 靑山流水니라” 숭산당 행원대종사는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 각지에 홍포해 오셨으며,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원력에 의해 한국 불교 최초의 홍법원이 일본에 개설된 이래 현재 세계 32개국 120여 개 홍법원이 개설되어 5만여 벽안(碧眼) 납자와 제자들이 수행 정진하고 있습니다. 숭산당 행원대종사의 영결식은 대한불교조계종 7교구 본사 덕숭산 수덕사에서 오는 12월 4일(토) 오전 10시 30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될 예정입니다. 숭산당 행원대종사 행적 숭산스님은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 총독의 압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은 극심하게 탄압 받고 있었습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1. 출가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지 열흘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2.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수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습니다.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비금로(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행객비고인(背囊行客非古人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탁이성관고금(濯濯履聲貫古今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가가오성비상수(可可烏聲飛上樹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햇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셋째 날에 숭산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스님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결국 스님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선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 (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3. 득도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였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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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임명장 수여식 가져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스님 임명장 수여식 가져.. 학교법인 승가학원(이사장 법장스님)은 지난 29일 오전 11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회의실에서 제68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전임 총장 종범스님을 만장일치로 재선임하였습니다. 이에 학교법인 승가학원 이사장 법장스님은 11월 30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에서 임명장 수여식을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법장스님은 "승가화합을 바탕으로 승가상 정립과 학교발전을 위해 더욱 더 노력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종범스님은 "승가대학의 발전을 위해 이사장인 총무원장 스님과 이사분들의 뜻을 잘 받들어 학교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04-11-30 1,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