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3년 종정예하 하안거 결제 법어
己亥年 宗正猊下 夏安居 結制法語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若論此事(약론차사)일진댄
千聖靈機不易親(천성영기불이친)이라.
龍生龍子莫因循(용생용자막인순)하라.
眞際奪得蓮城壁(진제탈득연성벽)하니
秦主相如摠喪身(진주상여총상신)이로다.
이 일을 논할 진댄
일천성인의 신령한 기틀도 쉽게 친하지 못한지라.
용이 용새끼를 낳아서 따른다고 이르지 말라.
진제가 연성의 보배구슬을 빼앗아 가지니
진나라 임금과 상여가 다 생명을 잃음이로다.
금일(今日)은 기해년 하안거 결제일이라. 여름과 겨울에 사부대중이 모여서 결제하는 수행전통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훌륭한 전통이다.
그러면 대중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수행(修行)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천이백 대중을 모아놓고 물으시기를,
“대중이 얼마나 공부를 시켜 주느냐?"
하니, 아난 존자(阿難尊者)가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대중이 반을 시켜줍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네가 잘 알지 못했다. 대중이 전체를 시켜주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대중의 힘이라는 것은 무섭다. 게으름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중이 모여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가운데는 용맹(勇猛)과 신심(信心)을 내어 애쓰고 애쓰는 이나, 화두일념삼매(話頭一念三昧)에 들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참구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러한 이들을 보고 각자가 자신을 반성하여, 다시 신심(信心)을 내고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를 다져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대중이 공부를 전체 다 시켜 준다고 하셨던 것이다.
결제에 임하는 사부대중은 다시금 결제가 갖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금번 결제에는 반드시 대오견성하겠다는 용맹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결제에 임해야 할 것이라.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고 이 화두를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밥을 먹으나 산책을 하나 일상생활(日常生活)하는 가운데 챙기고 의심해야 할 것이라.
그리하다 보면 문득 참의심이 발동하여 보는 것도 잊고 듣는 것도 잊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푹 빠져 있다가,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고 마음의 고향에 이르게 됨이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설산(雪山)에서 6년의 용맹정진 끝에 일념삼매에 들어 납월 팔일 새벽 별을 보고 대오견성(大悟見性)하셨음이라. 그 후에 대중들에게 49년간 가지가지의 방편법문을 하셨다.
대중에게 세 번 특별한 법문을 하신 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한 번은 인천(人天) 백만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좌정(坐定)하고 있을 때,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께 우담바라 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받아서 아무 말 없이 대중에게 보이시니 오직 가섭 존자(迦葉尊者)만이 빙그레 웃으셨다.
또 한 번은, 법회일에 모든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서 다 운집(雲集)해 있었는데 맨 마지막으로 가섭 존자(迦葉尊者)가 들어오니,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시기 위해서 법상에 좌정해 계시다가 자리의 반을 비켜 앉으셨다.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고는 선뜻 그 자리에 가서 앉으니, 부처님께서 가사를 같이 두르시고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일주일 후에, 교화(敎化)를 위해 수백 리 밖의 타방(他方)에 가 있던 가섭 존자가 돌아와, 부처님의 시신을 향하여 위요삼잡(圍繞三匝)하고 합장 예배를 올리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사생(四生)의 자부시여! 우리에게 항상 법문하시기를,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원래 없다. 하시더니, 이렇게 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칠 푼 두께의 금관 속에서 두 발이 쑥 나왔다.
그래서 가섭 존자가 다시 합장 예배를 올리니, 두 발은 관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관이 그대로 중천(中天)에 떠올랐는데 이 때, 지혜삼매(智慧三昧)의 불이 일어나 허공중에서 화장(火葬)되어 팔곡사두의 사리가 나왔다.
이렇듯 당시에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가섭 존자만이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를 알았기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는데 마하 가섭에게 전해 주노라.”
하시어 가섭 존자에게 견성심인법(見性心印法)을 인가(認可)하여 전하셨다.
이 삼처전심의 법문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아는 것이고, 만 중생을 지도함에 있어서 눈을 멀게 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을 일생 따라 다니면서 모셨던 아난 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였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가섭 존자에게 가서 물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가사와 발우를 신표(信標)로 전했는데, 그 외에 따로 전하신 법이 있습니까?”
이에 가섭 존자가 “아난아” 하고 부르자, 아난이 “예” 하고 대답하니,
“문전의 찰간(刹竿)을 거꾸러뜨려라.” 하고 가섭 존자가 한 마디 던졌다.
그러나 아난 존자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졸다가는 떨어져 죽게 되는 아주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3·7일간 용맹정진하여 그 도리를 깨달아서 가섭 존자의 법을 이어 받았다.
그 법이 제 3조인 상나화수 존자에 전해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하여 제 28조 달마 조사에 이르게 되었다.
달마 조사는 인도에서의 인연이 다함을 아시고 중국으로 건너와 숭산의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을 하면서 시절인연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법을 전해줄 큰 그릇을 하나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혜가(慧可) 스님이다.
달마 대사께서 하루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르셨다.
“너희들이 이제까지 정진(精進)하여 증득(證得)한 바를 각자 말해 보아라.”
그러자 도부(道副) 스님이 일어나서 말씀드리기를,
“제가 보는 바로는, 문자에도 국집(局執)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아니하는 것으로 도(道)의 용(用)을 삼아야겠습니다.” 하니, 달마 대사께서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라고 점검하셨다.
다음에 총지(總持)라는 비구니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는 바로는 경희(慶喜)가 아촉불국(阿閦佛國)을 한번 보고는 다시 보려고 한 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또, 도육(道育) 스님은,
“이 몸뚱이는 본래 공(空)한 것이고 오음(五陰)이 본래 있지 아니하니, 한 법도 마음에 둘 것이 없습니다.” 하니, 대사께서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라고 점검하셨다.
마지막으로 혜가(慧可) 스님이 나와서 아무 말 없이 예 삼배(禮三拜)를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달마 대사께서
“너는 나의 골수(骨髓)를 얻었다.”
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심인법(心印法)을 혜가 스님에게 부촉(付囑)하시니 이조(二祖) 혜가가 되었다.
달마 조사는 “내가 동토(東土)에 와서 법을 전함으로 미혹(迷惑)됨을 풀어 주매, 마치 한 송이 연꽃에 다섯 송이가 핀 것 같은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라고 일화오엽(一花五葉)을 수기(受記)하셨다.
육조(六祖)인 혜능 선사는 나무꾼으로서 시장에서 탁발승이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 후 황매산의 오조(五祖) 홍인(弘忍) 대사 회상을 찾아가서 방앗간에서 행자(行者)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오조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렇게 공포하였다.
“모두 공부한 바 소견(所見)을 글로 지어 바쳐라. 만약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법(法)을 전해서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리라.”
그러니 신수(神秀) 상좌가 게송을 벽에 붙여 놓았다. 오조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 게송대로 닦으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 하시며 향 피워 예배하게 하고 모두 외우라고 하셨다.
그래서 온 대중이 신수 상좌를 칭찬하며 그 게송을 외웠는데, 마침 한 사미승이 그 게송을 외우면서 노 행자(盧行者)가 방아를 찧고 있던 방앗간 앞을 지나갔다.
노 행자가 그 게송을 들어보고, 그것이 견성(見性)한 사람의 글이 아니니, “나에게도 한 게송이 있는데, 나는 글자를 모르니 나를 위해서 대신 좀 적어다오.” 하고 게송을 읊었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이 게송(偈頌)이 신수 상좌 글 옆에 붙으니 대중이 모두 놀라 서로들 웅성거렸다.
오조 대사께서 그 소란스러움 때문에 나오셔서 그 게송을 보시게 되었다.
보시니 그것은 진리의 눈이 열린 이의 글이라, 대중이 시기하여 해칠 것을 염려하셔서 손수 신짝으로 지워 버리면서 말씀하셨다.
“이것도 견성한 이의 글이 아니다.”다음날, 오조 대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찾아가서 쌀을 찧고 있는 혜능에게 물었다.
“방아를 다 찧었느냐?”
“방아는 다 찧었는데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
이에 오조 대사께서 방앗대를 세 번 치고 돌아가셨는데, 노 행자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대중이 다 잠든 삼경(三更)에 조실방으로 갔다.
오조 대사께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가사(袈娑)로 방문을 두르시고 금강경(金剛經)을 쭉 설해 내려가시는데,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 노 행자가 다시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오조대사께 말씀드리기를,
何期自性 本自淸淨(하기자성 본자청정)
어찌 제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리까
何期自性 本不生滅(하기자성 본불생멸)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나고 죽지 않음을 알았으리까
何期自性 本自具足(하기자성 본자구족)
어찌 제 성품이 본래 구족함을 알았으리까
何期自性 本無動搖(하기자성 본무동요)
어찌 제 성품이 본래 흔들림 없음을 알았으리까 何期自性 能生萬法(하기자성 능생만법)
어찌 제 성품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까
하니, 오조께서 노 행자가 크게 깨달았음을 아시고 법(法)을 전하시니, 이 분이 바로 육조 혜능 선사이다. 혜능 선사에 이르러 중국선종인 조사선이 확립되었다.
그 심인선법(禪法)이 홑[單]으로 전해지다가 육조(六祖) 혜능 선사에 이르러서는 그 문하(門下)에서 크게 흥성(興盛)하여 많은 도인(道人) 제자들이 배출되어 천하를 덮었다.
그 가운데 으뜸가는 진리의 기봉(機鋒)을 갖춘 분이 남악 회양(南嶽懷讓) 선사와 청원 행사(靑原行思) 선사이다.
이후 청원 행사, 남악 회양 두 분 선사의 계파(系派)를 좇아서 선가(禪家)의 오종(五宗)이 벌어졌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에서 종풍(宗風)을 떨치고 있는 선법(禪法)은, 육조 혜능 선사의 이 두 상수(上首)제자의 법(法)이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하루는 남악 회양 스님이 육조 선사를 친견(親見)하니,
“그대는 어디서 오는고?” 하고 물으셨다.
“숭산(崇山)에서 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하는 물음에 답을 못하고 돌아가서는 6년간 용맹정진 후에 답을 알아 와서,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닦아 증득하는 법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닦아서 얻음은 없지 아니하나 더러운 데 물드는 일은 없습니다.”
“더러운 데 물들지 아니함은 모든 부처님의 살림살이이다. 너도 그러하고 나도 또한 그러하니 잘 두호(斗護)하라.?
진리의 눈이 열리면 이렇게 쉽다. 묻고 답하는 데 두미(頭尾)가 이렇게 척척 맞게 되어 있는 법이다.
또 청원 행사 스님이 육조 선사를 처음 참예(參詣)하여 예 삼배를 올리고 여쭙기를,
“어떻게 해야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니, 육조 대사께서 도리어 물으셨다.
“그대는 무엇을 닦아 익혀왔는고?”
“성인(聖人)의 법(法)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어떠한 계급에 떨어졌던고?”
“성인의 법도 오히려 행하지 않았거늘, 어찌 계급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육조 선사께서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행사 스님을 제자로 봉(封)하셨던 것이다.
육조 선사께서 이렇게 인증(印證)하셔서, 형과 아우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안목(眼目)을 갖춘 이 두 제자를 상수제자(上首弟子)로 봉(封)하셨다.
청원 행사 스님은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진리의 체성(體性)을 전하셨고, 남악 회양스님은 향하(向下)의 대용(大用)의 법을 전하셨다.
이 진리 자체에는 체(體)와 용(用)이 본시 둘이 아니어서, 체가 용이 되기도 하고 용이 체가 되기도 하여 둘이 항상 일체이다.
그래서 구경법(究竟法)을 깨달아 향상(向上)의 진리를 알게 되면 향하(向下)의 진리도 알게 되고, 향하의 진리를 알면 향상의 진리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둘이 아니면서 이름이 둘이다.
이후에 행사 선사의 문하에서는 조동종(曹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이 벌어지고, 회양 선사 문하에서는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潙仰宗)이 벌어져 선가오종(禪家五宗)을 형성하며 중국 천하를 풍미(風靡)했던 것이다.
행사 선사 밑으로 덕산(德山) 선사로 쭉 이어져 내려왔고, 회양 선사 밑으로 임제(臨濟) 선사로 이어져 내려왔으니,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은 육조 문하의 양대 아손(兒孫)의 가풍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려 말엽, 불법(佛法)이 쇠퇴일로를 걷고 있을 당시에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이 각고정진(刻苦精進) 끝에 선지(禪旨)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도 부처님의 정법정안(正法正眼)을 전수받아 와서, 바른 진리의 법을 펴야겠다는 큰 원[大願]을 세우고, 중국의 원나라에 들어가서 제방(諸方) 선지식들을 참방(參訪)하셨던 것이다.
하루는 제 56조 법손인 석옥 청공(石屋淸珙) 선사를 참방(參訪)하여 예배하고 말씀드렸다.
“고려국에서 스님의 높으신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그러자 청공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시기를,
“우두 법융(牛頭法融) 스님이 사조 도신(四祖道信) 선사를 친견하기 전에는, 어찌하여 천녀(天女)들이 공양을 지어 올리고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왔는고?"
하니, 태고 보우 스님이
“부귀(富貴)는 만인이 부러워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우두 스님이 사조 선사를 친견한 후로는, 어찌하여 천녀들이 공양을 올리지도 않고, 새들도 꽃을 물어오지 아니했는고?"
“청빈(淸貧)함은 모든 분들에게 소외되기 쉽습니다."
그러자 청공 선사께서 두 번째 물음을 던지셨다.
“공겁(空劫) 전에 태고(太古)가 있었는가?"
우주의 모든 세계가 벌어지기 전이 공겁(空劫)인데, 그 공겁 전에도 그대가 있었는가 하고 물으신 것이다.
“공겁의 세계가 태고로 좇아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청공 선사께서 주장자(拄杖子)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일생토록 이 주장자를 써도 다 쓰지 못한 고로, 이제 그대에게 부치노니 잘 받아 가져서 광도중생(廣度衆生)하기 바라노라."
이렇게 태고 보우 스님이 부처님의 정법정안(正法正眼)을 부촉(付囑)받으니 제57조 법손이 되어서 그 법맥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그 후, 조선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면면(綿綿)히 이어지고, 조선 중기의 제 63조 청허 휴정 선사로 이어지고 그 법이 편양 언기 선사로 이어진 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풍전등화(風前燈火)로 그 법맥이 이어져 왔다.
근세인 한말(韓末)에 제 75조 경허(鏡虛) 선사에 이르러 선풍(禪風)을 크게 중흥하여 상수제자인 혜월(慧月) 스님에게로 법(法)을 전했다.
혜월 스님은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여 경허 선사로 부터 화두를 타서 3년간 불철주야정진을 했다. 어느 날, 짚신 한 켤레를 다 삼아놓고서 잘 고르기 위해 신골을 치는데, ‘탁’하는 소리에 화두가 타파되었다.
그길로 경허 선사를 찾아가니, 경허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다.
“눈앞에 홀로 밝은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이에 혜명 스님이 동쪽에서 몇 걸음 걸어서 서쪽에 가서 서니, 경허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다.
“어떠한 것이 혜명(慧明)인가?”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이에 경허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인가하시고 ‘혜월(慧月)’이란 법호와 함께 상수제자(上首弟子)로 봉(封)하시고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혜월 선사께서는 남방으로 내려와서 천진도인으로 선풍을 날리시고 운봉(雲峰) 선사에게 그 법을 전해주었다.
운봉 스님은 동진(童眞)으로 출가하여 경전과 율장을 모두 섭렵하였지만 마음에서 흡족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방의 위대한 선지식이신 혜월 선사를 찾아가서 10년 동안 열심히 참구하였다.하지만 화두순일(話頭純一)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며, ‘화두일념이 현전하고 견성대오하여 종풍을 드날려 광도중생 하여지이다’ 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기도를 드렸다. 100일기도를 회향하고 백양사 운문암에서 불철주야 정진한 끝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루어, 어느 날 새벽 선방문을 열고 나오니 온 산하대지가 밝은 달에 환하게 밝은 것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으셨다.
出門驀然寒徹骨(출문맥연한철골)
豁然消却胸滯物(활연소각흉체물)
霜風月夜客散後(상풍월야객산후)
彩樓獨在空山水(채루독재공산수)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작스레 찬 기운이 뼈골에 사무침에
가슴 속에 막혔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버렸네.
서릿바람 날리는 밤에 객들은 다 돌아갔는데
단청누각은 홀로 섰고 빈 산에는 흐르는 물소리만 요란하더라.
그리하여 그 당시 부산 선암사에 계시던 혜월 선사를 참예하여 여쭈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 선사께서 말없이 앉아 보이시므로 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면서 또 여쭈었다.
“산 용이 어찌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그러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
하시는 물음에, 성수 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혜월 선사께서는 “아니다!” 하셨다.
이에 스님이 다시 응수를 하셨다.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 지 이미 오래입니다.”
혜월 선사께서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흡족해 하셨다.
“내 너를 속일 수가 없구나!”
그리하여 을축년에 ‘운봉(雲峰)’이라는 법호와 함께 상수제자로 봉(封)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셨다.
운봉 선사께서는 이 후에도 제방의 선원을 다니면서 후학을 지도하며 선풍을 크게 날리시고 그 법이 향곡(香谷) 선사에게로 전해졌음이라.
향곡 선사는 16세 때 스님이었던 형님을 만나러 어머니와 함께 운봉 선사께서 조실로 계시는 천성산 내원사에 가게 되었다.
그 때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참선을 하는 광경을 보고는 모친만 집으로 되돌아가시게 하고는 운봉 선사로부터 화두를 타서 공양주를 2년간 하면서 정진하였다.
어느 봄날에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와 열어놓은 문이 ‘왈카닥’ 닫히는 소리에 마음의 경계가 있어 운봉 선사를 찾아갔다. 조실방을 들어서는 그 모습이 당당하니 선사께서 이미 가늠하시고 목침을 내밀어 놓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 일러라!”
향곡 선사가 즉시에 목침을 발로 차버리니,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일러라.” 하셨다.
향곡 선사가 말하였다.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다 몽중설몽(夢中說夢)이라. 모든 불조(佛祖)가 나를 속였습니다.”
이에 운봉 선사께서 크게 기뻐하시었다.
그리하여 신사년 8월에 ‘향곡(香谷)’이란 법호와 함께 상수제자로 봉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임제정맥의 법등을 상속 부촉하여 가시니, 즉 임제, 양기, 밀암, 석옥, 태고, 휴정, 환성, 율봉, 경허의 적전(嫡傳)인 것이다.
그 후 정해년 문경 봉암사에서 도반들과 정진하던 중,
殺盡死人方見活人(살진사인방견활인)
活盡死人方見死人(활진사인방견사인)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여야만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다하여야만 비로소 죽은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한번 일러보라.” 하는 한 도반의 말에 삼칠일동안 침식을 잊고 일념삼매에 들었다가 홀연히 자신의 양손이 들리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하시고 게송을 읊으셨다.
忽見兩手全體活(홀견양수전체활)
三世佛祖眼中花(삼세불조안중화)
千經萬論是何物(천경만론시하물)
從此佛祖總喪身(종차불조총상신)
鳳巖一笑千古喜(봉암일소천고희)
曦陽數曲萬劫閑(희양수곡만겁한)
來年更有一輪月(내년갱유일륜월)
金風吹處鶴唳新(금풍취처학려신)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드러났네.
삼세제불도 눈[眼] 속의 꽃이로다.
천경만론은 이 무슨 물건인가.
이로 좇아 불조가 모두 몸을 잃어버렸도다.
봉암사에 한 번 웃음은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에 한가롭도다.
내년에 다시 한 수레바퀴 밝은 달이 있어서
금풍(金風:가을바람)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로써 우리나라에도 당송(唐宋) 시대 조사스님들의 향상구(向上句)를 제창하게 되었다. 이후로는천하 노화상(老和尙)의 혀끝에 속임을 입지 않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하며 제방에서 대사자후를 하시며 후학을 지도하시며 선풍을 크게 날렸음이라.
산승은 향곡 선사 회상에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받아 산문을 나서지 않고 정진하였다.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였는데, 28세 되던 가을에 새벽에 예불 드리러 올라가다가 마당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일어나는 차제에 ‘향엄상수화’ 화두관문(關門)을 뚫어내었다. 비로서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종전의 미(迷)함이 걷혀지고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곡 선사께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올렸다.
這箇拄杖幾人會(자개주장기인회)
三世諸佛總不識(삼세제불총불식)
一條拄杖化金龍(일조주장화금룡)
應化無邊任自在(응화무변임자재)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하누나.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이에 향곡 선사께서 앞 구절은 묻지 아니하고 뒷 구절을 들어서 물음을 던지셨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산승이 답하기를,
“당황하여 몸을 움츠리고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굴절당흉퇴신삼보)]”
하니,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공안에는 걸림 없이 해결되었는데 오직 ‘일면불 월면불(一面佛月面佛)’ 공안에만 다시 막혔다. 그래서 또 다시 5년여 동안 전력(全力)을 쏟아 참구(參究)함으로써 해결되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一棒打倒毘盧頂(일봉타도비로정)
一喝抹却千萬則(일할말각천만측)
二間茅庵伸脚臥(이간모암신각와)
海上淸風萬古新(해상청풍만고신)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 후 산승은 33세이던 정미년 하안거 해제 법회일에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와 법거량(法擧量)이 있었다.
향곡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묵묵히 앉아계시는 차에 산승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선사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산승이 선사께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향곡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조실방으로 가셨다.
다음 날 선사님을 찾아가서 다시 여쭈었다.
“부처의 눈과 지혜의 눈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師姑元來女人做(사고원래여인주)]”
“오늘에야 비로소 선사님을 친견(親見)하였습니다.”
이에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산승이 이렇게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임제정맥의 법등을 부촉하시고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법이 등등상속(燈燈相續)하여 산승에 이르게 되어 부처님 심인법 제 79세 법손이 된 것이다.
향곡 선사께서는 열반하시기 전에 제방(諸方)의 조실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임제탁발화(臨濟托鉢話)’ 법문을 들어 물으러 다니셨다. 임제탁발화는 덕산탁발화와 더불어 유명한 공안(公案) 중의 하나이다. 역대의 선지식들이 이 법문에 대해서 평을 해놓은 분이 없었다.
제방을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해운정사에 오셨다. 마당에서 선 채로 임제탁발화(臨濟托鉢話)를 들어 물으셨다.
하루는 임제 선사께서 발우를 들고 탁발을 나가셨다. 어느 집 앞에 가서 대문을 두드리니 노파(老婆)가 문을 열고 나왔다. 탁발 나온 임제 선사를 보더니 노파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염치없는 중이로구나”
그 말을 들은 임제 선사가 말했다.
“어째서 한 푼도 시주하지 않고 염치없는 중이라 하는가.”
임제 선사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노파는 대문을 왈칵 닫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임제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절로 돌아오셨다.
향곡 선사께서 임제탁발화를 들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승이 답을 올렸다.
三十年來弄馬騎(삼십년래농마기)러니
今日却被驢子搏(금일각피려자박)이로다.
삼십년간 말을 타고 희롱해왔더니
금일 당나귀에게 크게 받힘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과연 나의 제자로다”라고 하며 기뻐하셨음이라.
법거량이란 이와 같이 전광석화(電光石火)로 문답이 오고가야 하는 것이다.
역대(歷代)의 모든 불조(佛祖)께서 끊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부처님 심인법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진 후, 오직 한국에서만 오늘날까지 그 법이 우리의 선불장(選佛場)에서 오롯하게 남아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 귀하고 귀한 부처님의 심인법을 다시 세계에 널리 선양(宣揚)해야 할 것이라.
[주장자(拄杖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