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조(重闡祖) 보조지눌국사

 
중천조란 종단의 종지를 분명하게 밝힌 조사스님을 말한다.
 
 
조계종의 중천조(重闡祖)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국사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태어났다. 목우자(牧牛子)는 국사의 자호(自號)이며 입적한 후 고려 희종은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조국사는 어려서 입산하여 25세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에는 승과제도가 있어 승과에 합격하면 출세의 길을 얻을 수도 있는 시대였으나 보조국사는 그것을 홀연히 버리고 개경을 떠나 깨달음의 정진에 몰두하였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홀연히 마음이 밝아졌고 1185년에는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통독하였다.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定慧)를 닦다가 1198년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정진하였다. .
 
 
1200년 되는 43세에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 정혜결사를 추진하여 11년 동안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법을 행하여 승·속이 함께하는 총림(叢林)을 이루었다. 보조국사는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에서 선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세존이 입으로 설하신 것이 교(敎)요, 조사(祖師)가 마음에 전한 것이 선(禪)"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보조국사 지눌은 사람들에게 항상 『금강경』을 지니고 암송하게 하였으며 법을 세우고 그 뜻을 말할 때는 『육조단경』을 전거(典據)하였고, 또 이통현의 『화엄경』과 『대혜어록』을 참고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보조국사의 사상들은 12세기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선 정치적으로 타락한 불교를 바로 잡아 정법(正法)을 구현하고 불교적으로는 선교(禪敎)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 그 당시 고려불교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일관하셨으며 스님의 사상도 그러한 고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03년에 국왕(희종)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편액을 내려 격려하였다. 보조국사는 1210년 53세에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법상에서 그대로 입적하였다. 전법제자 진각국사가 정혜결사 2대 법주가 되어 법을 이었으며, 이후 14분의 국사가 배출되었다.